백선엽 장군이 23일 서울 신길동 공군회관에서 열린 6·25 특별강연에서 자신의 전쟁 경험담을 말하고 있다. 지난 17일부터 참가 신청한 3000여 명의 독자 중 600여 명이 선정돼 백장군으로부터 전쟁의 실상과 대한민국 재건 과정을 들었다. 백 장군은 2010년 1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을 본지에 연재했다. [김도훈 기자]


6·25전쟁 61주년을 이틀 앞둔 23일 오후 2시. 서울 대방동 공군회관 대연회장은 장맛비를 뚫고 온 600여 명의 청중으로 가득 찼다. 중앙일보가 지난 3월에 이어 두 번째로 마련한 백선엽(91) 장군의 ‘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 강연회. 로비엔 독자들을 상대로 한 전화 신청이 일찌감치 마감되면서 좌석을 얻지 못한 10여 명이 빈자리가 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6·25를 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을 통해 풀어낸 중앙일보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의 반향이 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백 장군이 강연장에 도착하자 ‘와 와’ 하는 환호성이 터졌다.

 “1948년 건국 후에도 반란군을 토벌하는 데 에너지를 쏟고 있었던 한국 군은 ‘모내기가 바쁘다’며 장병들 휴가를 다 보내주고 그랬습니다. 그때 5년 동안 전쟁 준비를 해온 김일성이 일요일 새벽 4시에 기습한 거죠.” 백 장군은 모아둔 사진 자료들을 보여주며 6·25전쟁의 결정적인 국면들을 하나씩 소개했다. 노 장군은 60년 전의 일을 어제 일처럼 이야기하며 청중을 숙연하게도 하고 웃음짓게도 만들었다.

 “낙동강 전투 때입니다. 미 27연대장이던 마이켈리스 대령이 ‘한국군이 자꾸 도망간다’고 해요. 제가 우리 병력이 있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우린 더 갈 데가 없지 않나. 미국이 도와주러 왔는데 우리가 이러면 안 된다.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라’라고 했지요. 그러고는 권총을 빼 들고 돌격했습니다.” 장내엔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백 장군은 50년 10월 19일을 ‘인생 최고의 날’이라고 했다. 인천 상륙 작전 뒤 평양 진격 때였다. “한국군은 전차가 없으니 해주로 가라고 했지만 미군을 설득해 올라갔어요. 군화도 없던 우리 병사들의 발은 피투성이가 됐죠. 밤에는 내가 ‘평양’하면 병사들도 ‘평양’이라 맞장구 치면서 죽을지 살지 모르고 진격했습니다. 10월 19일 우리가 미군 기병사단보다 먼저 입성했어요.” 장군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카랑카랑해졌다.

 “이 사진, 밴플리트 미 8군사령관이 함께 참전한 아들의 전사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는 장면입니다. 먼 땅에서 온 이들과 우리 전우들이 목숨을 바친 이 나라가 지금 위대한 대한민국이 된 겁니다. 결코 한 인치(1inch)의 땅도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란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이 위대한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킬 의무가 남은 우리 4000만에게 있는 겁니다.”

 숙연함과 웃음 속에 2시간여 진행된 이날 행사에선 지난해 6월부터 거의 매일 백 장군을 만나 총 277회 연재물로 완성한 유광종 기자가 백 장군을 인터뷰한 뒷얘기도 소개했다. 유 기자는 “백 장군이 다른 이들의 공(功)을 얘기할 땐 적극적이지만 자신의 공을 얘기할 땐 말을 아낀 탓에 힘이 들기도 했다”며 “백 장군은 부단한 노력, 극기로 전쟁 철학을 완성하고 어떤 적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의 경지에 오른 분”이라고 말했다. 백 장군도 “유 기자는 나의 파트너”라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회사를 하루 쉬고 왔다는 조도애(44·여)씨는 “6·25를 백 장군의 강연으로 듣고 싶어 딸(주소연·수원 율전초 5년)도 조퇴시키고 함께 왔다”며 “모녀가 ‘땡땡이’를 치길 잘했다”고 했다. 서한종(배재대 테솔영어과 1년)씨는 “대한민국의 치열한 역사를 백 장군을 통해 들으면서 내 삶을 더 성찰하게 됐다”고 말했다. 한 60대 청중은 “강연 동영상을 만들어 젊은 사람들이 다 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글=김수정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