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당시 중공군은 전선 전역에 걸쳐 갱도와 참호를 파 총 연장 길이 3600㎞가 넘는 지하 요새를 구축했다. 굴 입구에는 ‘무적갱도(無敵坑道)’라는 푯말을 붙이기도 했다. 사진은 중공군이 산 속에 굴을 뚫는 장면. 『그들이 본 한국전쟁1』(눈빛)에 실렸다.


많은 전투를 하다 보면 드는 생각이 있다. 전투는 승리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승리는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가까스로 다가오는 경우다. 전투에서는 승리할 때보다 그러지 못할 때가 더 많다. 대개 공방(攻防)이 교대로 펼쳐져 평형을 유지하는 경우도 많고, 가까스로 전선에서 한 발짝 더 나서서 소규모 이익을 올리거나 그 반대인 경우도 많다.

 완벽한 승리를 거두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 모든 경우를 잘 관리하는 게 전투를 이끄는 장수의 의무다. 특히 전선이 밀려 패전의 조짐이 나타날 때가 중요하다. 승리는 분위기를 탄다. 패배 역시 분위기가 중요하다. 한 번 밀리면 계속 밀리는데, 뛰어난 지휘관은 이 밀리는 상황도 잘 관리하는 사람이다.

 국군은 신생 대한민국의 출범과 함께 진용(陣容)을 갖추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건국 2년 뒤에 맞은 전쟁에서는 아직 약했다. 훈련이 부족했고, 조직 또한 엉성했다. 무기체계를 의미하는 장비라는 측면에서도 국군은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국군이 10년 이상의 내전 경험과 풍부한 대일(對日) 항전 경험이 있는 중공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국군은 그런 여건에서 다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를 맞았다. 제임스 밴플리트 전임 미 8군 사령관 시절부터 줄기차게 국군의 전력 증강을 추진했으나, 이번에 마주하는 중공군의 공세에 국군이 과거와 다른 대응에 나설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중공군의 53년 6월 공세는 51년 강원도 현리에서 국군 3군단이 와해됐던 춘계 공세 이후 최대 규모였다. 중공군의 당시 보급 상태는 아주 양호했다. 그들은 국군 장병이 하루 섭취하는 것보다 많은 열량을 취했고, 야포와 장비 동원 면에서도 과거의 전력보다 크게 증강된 수준이었다.

 당시의 전선은 휴전회담의 장기화에 따른 소강상태를 맞아 진지를 크게 보강한 뒤였다. 그 점은 양측 모두 마찬가지였다. 중공군은 미군의 폭격을 의식해 깊고 견고한 동굴 진지를 종횡으로 연결해 놓았다. 국군 또한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등의 전선에 동굴 진지를 비롯해 흙과 돌, 나무 등을 사용해 만든 뚜껑이 있는 이른바 유개호(有蓋壕)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그래서 선공(先攻)에 나선 중공군이 먼저 고지 위에 올라설 경우 방어를 해야 하는 국군은 모두 참호 속으로 들어간 뒤 후방의 포병에게 아군의 진지를 직접 쏘는 진내(陣內) 사격을 요청했다. 고지 위에 올라선 중공군은 참호의 입구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후방에서 날아온 아군의 포격을 맞아야 했다.

 그런 희생을 무릅쓰면서도 중공군은 막대한 병력을 앞세워 고지를 계속 밀고 올라왔다. 문제는 중공군의 화력이 과거에 비해 훨씬 강해졌다는 점이었다. 앞에서 소개한 현리 전투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대목이다. 중공군은 대공세를 취하기 전 ‘공격준비사격’이라는 것을 한다. 상대의 진지에 먼저 포격을 집중해 그 후방과의 통신선을 끊고 장비를 타격하면서 공격의 발판을 미리 만드는 작업이었다.

 53년 6월 공세에 앞서 중공군은 이런 공격준비사격을 매우 강렬하게 펼쳤다. 사전에 아군이 정찰한 바로는 국군 2군단의 전면에는 중공군 6개 사단이 포진했고, 그 후방에는 34개 대대의 포병이 390문의 야포를 배치해 전선을 받치고 있었다. 말 1만 필과 마차 1500여 대도 동원했다.

 대규모 포병이 지원하고 있던 당시 중공군의 공세는 참호 속에서 고지를 지켜야 하는 국군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맹렬한 포격으로 고지의 참호와 후방의 통신선은 자주 끊겼고, 무선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의 국군은 그런 포격과 통신선 두절로 큰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드는 형국이었다.

 53년 6월의 중공군 공세는 금성 돌출부의 오른편에 해당하는 국군 8사단과 5사단을 향해 펼쳐졌다.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에 전개한 6개 사단 병력 외에 후방에서 다시 4개 사단을 증원해 전선에 펼쳐 놓은 상태였다. 막대한 병력과 그 뒤를 받쳐주는 강력한 포병으로 과거와는 다른 중공군의 공세가 벌어졌던 것이다.

 중공군은 해가 지는 일몰(日沒) 시점을 택해 공격 병력을 전선 가까이 옮겼고, 밤의 어둠이 깊어진 9시를 전후해 공격했다. 적의 포격은 매우 강렬해 지상에 연결해 놓은 통신선은 물론이고 땅에 묻었던 통신 간선(幹線)까지 끊을 정도였다.

 전투에서 물러서는 방법은 역시 중요했다. 적이 공격해 오는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해 그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두는 게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의 국군은 그런 원숙함을 갖추지 못했다. 중공군의 강렬한 공세는 전선 곳곳에서 국군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이 있다. 53년까지의 국군에게는 중공군에 대한 묘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중공군이 이 땅의 전쟁에 뛰어든 뒤 국군이 여러 차례 그들에게 당했던 깊은 패전의 그림자 때문이었다.

 그 깊고 어두운 상처가 다시 살아날 조짐이었다. 그러나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나는 그런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적인 전투 지휘는 미 8군 맥스웰 테일러 사령관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당시 국군 1개 사단의 편제는 1만2000명. 정규 사단 병력으로서 충분한 숫자이기는 했으나 그 3분의 1에 해당하는 병력은 막 신병훈련소에서 16주의 교육을 받고 나온 신병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전투를 경험하지 못했던 신병들에게는 병력에서 일단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던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치는 게 어려웠다.

 국군 8사단과 5사단의 고지가 점차 중공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아군은 주저항선(主抵抗線)까지 쉽게 밀려 내려왔다. 그 다음의 대응이 어떻게 이뤄지느냐에 따라 전선의 상황은 크게 달라질 판이었다. 나는 지난날 내가 직접 겨뤘던 중공군의 장단점을 새겨보면서 전선 상황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