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중국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이 6·25전쟁에 참전했다 귀국한 중공군 장병들의 환영식 대회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중국은 50년 당시 240만 명에 달하는 해방군 병력을 보유했다. 그들은 이 중 절반에 약간 못 미치는 75~81개 사단 100만 명이 넘는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할 정도로 민감하게 대응했다. [중국 해방군화보사]


대규모 군대를 보내 한반도의 전쟁에 뛰어들었던 중국 역시 휴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53년 4월 들어서 중국은 그런 태도를 분명히 했다. 그 전달에 소련의 강력한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한 뒤 상황을 저울질하던 중국이 내린 전체적인 방향은 휴전협정을 가급적 이른 시일 안에 마무리짓겠다는 것이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미국은 한국에서 하루빨리 휴전협정을 체결하겠다는 방향으로 매진하고 있었다. 중국 또한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강력한 단독 북진 의사를 천명하고, 한국의 국회가 이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확전의 가능성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을 염려하고 있었다.

 만일 한국의 단독 북진으로 확전이 불가피해지는 상황이 닥친다면 중국 자신에게도 결코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당시 미국은 이미 핵을 전술적으로 구사하는 능력을 상당한 수준까지 높인 상황이었다.

 중국은 한국의 단독 북진에 이은 확전 상황이 닥칠 경우 미국의 핵 능력이 중국을 공격해 올 수도 있다는 점을 따져보고 있던 때였다. 따라서 중국 또한 한국의 단독 북진 결행의 변수가 돌발적으로 발생하기 전에 휴전을 마무리하면서 한국의 전선을 잠시나마 평화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정책의 무게를 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물러설 중국은 아니었다. 그들은 휴전을 앞두고 소강상태의 전선에 긴장감을 불어넣음으로써 몇 가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우선 휴전회담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축적했던 화력과 물자보급 능력을 전선에서 과시함으로써 휴전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던 대한민국을 압박할 수 있다고 봤다.

 아울러 휴전을 기정사실화한 만큼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 유엔 참전국가의 군대와 맞서고 있던 전선을 자신에게 최대한 유리하도록 설정함으로써 김일성이 도발한 한반도의 전쟁에서 자신들이 승리했다는 점을 대내외에 과시하려 했던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隱密)하게 기동(機動)함으로써 상대에게 예기치 못한 타격을 주는 상대가 중공군이었다. 야음(夜陰)이 짙게 펼쳐져 사주(四周) 경계가 쉽지 않은 밤을 이용해 괴상한 피리 소리와 꽹과리 소리를 내면서 심리전과 함께 기동과 우회, 매복과 포위를 반복하던 중공군이 다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은 보통 이상의 경계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대구의 육군본부에 머물며 매일 아침 전선 상황을 브리핑받으면서 이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던 시점은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을 강행했던 53년 6월이었다. 특히 6월 들어서면서 그들의 전선 주요 병력이 이곳저곳으로 부산하게 움직이는 것이 포착됐다.

 여러 군데를 공격하는 듯했으나 저들의 공세가 집중적으로 펼쳐졌던 곳은 예상대로 국군이 저항선을 펼치고 있던 ‘금성 돌출부’였다. 강원도 춘천과 2군단 사령부가 있던 소토고미의 북방에 금성천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이었다. 당시 대치하고 있던 전선을 남쪽에서 볼 때 그곳은 금성을 중심으로 북쪽을 향해 타원형의 모습을 띠고 올라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늘 ‘금성 돌출부’라 불렀고, 내가 52년 이끌었던 2군단이 저항선을 펼치면서 적의 공세에 맞섰던 곳이었다. 그 남쪽으로는 화천 저수지가 있었고, 당시 전력(電力)이 크게 모자랐던 대한민국 사정에서는 유일하게 수력댐을 운용하고 있던 지역이라서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했던 곳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노릴 곳은 화천 저수지였다. 국군이 지탱하고 있는 전선에 대규모의 강력한 병력을 투입해 대한민국의 유일한 수력댐을 탈취하는 한편, 휴전협정이 조인될 경우 북의 전선을 춘천 인근의 깊숙한 남쪽으로까지 확대한다는 목표를 세운 것으로 보였다.

 전선에서 움직이고 있던 적은 중공군이었다. 김일성이 지휘하는 북한군은 이미 전력을 상실했거나, 군대의 외형을 다시 세웠다고는 하지만 강력한 미군과 유엔군을 상대하기에는 전투력이 떨어지는 군대였다. 전선의 주적(主敵)은 중공군이었고, 그들이 막바지 휴전을 앞두고 대규모 공세를 계획한다는 조짐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6월 10일께부터 공격을 펼쳐왔다. 그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한반도 남쪽의 작전권을 쥐고 있던 미 8군 예하의 부대들이 지키는 모든 지역에서 가장 취약하다고 스스로 판단한 국군 2군단의 ‘금성 돌출부’를 향해 그들은 모여들었다.

 그리고 먼저 국군 8사단과 5사단이 지키고 있던 지역을 파고들었다. 전체 전선 정면은 13㎞였고, 중공군은 약 9일 동안 이곳에서 공세를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처음에 국군은 역시 강력한 중공군의 공세에 밀렸다. 당초의 전선으로부터 후방으로 4㎞를 밀려 내려왔다.

 나는 당시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국군이 밀리는 조짐을 보인다는 브리핑을 들으면서 깊은 걱정에 빠지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50년 10월 내가 국군 1사단장으로 북진을 거듭할 때 처음 평북 운산(雲山)에서 마주친 상대였다.

 51년의 강원도 현리 전투에서는 국군 3군단이 그들의 공세에 와해됐고, 그에 앞선 50년 10월의 북진 과정에서도 국군 2군단이 중공군에 의해 궤멸된 사례도 있었다. 국군은 컴컴한 어둠만을 이용해 공격을 펼치는 ‘밤의 군대’ 중공군에 다시 등을 보이면서 밀리는 분위기였다. 국군은 중공군을 늘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했고, 중공군은 그렇게 허약한 모습을 보이던 국군만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그 악순환이 다시 펼쳐질 것인가. 중공군의 공세는 아주 강했다. 전선은 다시 급격한 불안정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