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1월 서울을 점령한 중공군이 북한군과 어울려 중앙청 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 50년 10월 대규모의 병력으로 6·25 전쟁에 뛰어든 중공군은 기습과 우회, 매복의 전법을 구사하면서 국군이 담당하는 전선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휴전을 앞둔 53년 6~7월 중공군은 다시 국군을 향해 대규모 공세를 벌였다. [중국 해방군화보사]


당시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미군에 있었다. 직접적인 최고 책임자는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이었으며 실제 한국 땅에서 벌어지는 작전의 대부분은 지상군(地上軍) 사령관인 미 8군 맥스웰 테일러 장군이 이끌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육군본부의 헌병감을 통해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을 추진했다면 작전지휘권에 관한 미국과의 약속을 어긴다는 지적이 불가피했다. 이 대통령은 이 문제를 두고 당시 국군 편제에 있지 않았던 헌병총사령부를 새로 창설함으로써 1950년 6월 국군 작전지휘권을 미군에 넘긴 ‘대전(大田) 협정’ 위반이라는 혐의를 벗어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크 클라크 장군은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태였다. 미군도 공산 측에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단독으로 추진한 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설명하는 등 사태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석방한 포로를 다시 잡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국군과의 무력 충돌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세계를 경악으로 몰고 간 이 대통령의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은 그냥 그대로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이 대통령이 미국과 유엔 참전국, 나아가 북한과 중국 및 소련을 상대로 벌인 승부는 이 대통령의 멋진 한판승으로 결론이 나고 있었다.

 미국은 그런 이승만 대통령의 예측할 수 없는 승부사 기질에 매우 당황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끄는 당시의 미 행정부가 가장 큰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던 점은 이 대통령이 단독으로 북진을 감행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실제 이 대통령은 마크 클라크 장군 등 미 최고 지휘관들에게 “휴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혼자서라도 북쪽의 김일성 군대와 중공군을 상대로 싸우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거론하기도 했다.

 단독 북진. 망국(亡國)의 설움을 안고 길고 긴 독립투쟁의 반생을 살아온 대통령의 기개(氣槪)는 그를 감행할 만큼 넘치고 또 넘치는 상태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를 따져보고 저울질해 보는 작업도 필요했다. 더구나 대한민국 군대를 지휘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현실적인 가능성을 철저하게 따져보는 태도가 필요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단독 북진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이 대통령의 ‘단독 북진’ 발언을 정치적 제스처로 봤다. 이 대통령도 단독 북진이 결코 현실적인 주장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 때 강력하게 추진하기 시작한 국군 증강 작업은 ‘현재 진행 중’이었다. 6·25 개전 초기에 변변치 못한 전투력을 갖춘 10개 사단 병력에서 16개 사단으로 양이 늘었고, 보잘것없던 무기 체계 또한 미군이 보내준 155㎜ 야포 등으로 화력을 늘리고 있었으나 아직은 부족했다.

 그런 가정이 부질없는 것이겠으나, 만일 당시의 한반도 북쪽에서 중공군이 철수한 상태라면 단독 북진은 가능했다. 당시의 북한군은 개전 초기의 강력한 공세가 꺾인 뒤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미군과 유엔군, 국군의 북진에 밀려 북한군은 전투력을 상실했고, 일부는 중국 만주 지역으로 넘어가 재편하면서 다시 증강했다고는 하지만 전투력에서는 국군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문제는 중공군이었다. 그들은 병력이 압도적이었다. 물자 보급이나 화력(火力) 등에서 미군에 비해 떨어졌지만 휴전회담이 벌어지면서 소강상태에 들었던 전선 상황 때문에 나름대로 충분히 보강한 상태였다.

 그들이 한반도 북쪽에 버티고 있는 한 국군의 단독 북진은 불가능했다. 꾸준히 전력을 증강하고 있기는 했으나, 국군의 실력만으로 중공군을 상대하는 것은 아직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은 그럼에도 단독 북진의 뜻을 결코 철회하지 않았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은 그런 이 대통령을 설득하느라 분주히 서울과 도쿄를 오가야 했다. 대통령도 현실을 받아들일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국은 휴전의 전제로 한국과 미국의 상호방위조약을 약속했고, 이 대통령은 자신의 어떠한 뜻도 관철할 수 있다는 점을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행동을 통해 미국에 분명히 알린 상황이었다.

 분위기는 다시 휴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반공포로 석방이 있은 뒤 클라크 장군은 휴전을 통해 한국군 증강을 충분히 추진할 수 있다는 점, 현재로서는 이 방안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점을 이 대통령에게 설명했다. 대통령도 이 점을 점차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아이젠하워 행정부 또한 이 대통령이 취한 반공포로 석방을 두고 공산 측이 의외로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자 그대로 휴전회담 조인을 추진하는 분위기였다. 미 행정부는 그에 따라 53년 6월25일 월터 로버트슨 미 국무부 차관보가 이끄는 대표단을 한국에 파견했다. 한국 정부와 휴전회담의 전제로 약속했던 한·미 상호방위조약, 대한(對韓) 경제지원 등의 현안을 타결 짓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장장 18일 동안 대한민국의 노련한 전략가 이승만 대통령과 길고 지루한 협상을 벌여야 했다. 대통령은 문구 하나까지 직접 들여다보고 따졌다. 나도 경무대에서 여러 번 그 현장을 지켜봤다. 대통령은 변영태 외무부 장관 등 몇 사람의 각료만을 데리고 협상장에 들어가 미 대표단을 상대했다. 그때 대통령의 표정은 늘 단호해 보였다.

 이 대통령은 휴전을 받아들이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하나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미 대표단도 그런 이 대통령의 기세에 질려 피곤한 기색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렇게 휴전은 초읽기에 들어가고 있었다.

 전선에 조용하지만 심상찮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중공군의 움직임이 부쩍 많아졌다. 전선에서 소규모 전투가 빈발하고 있었고, 그 배후에서는 중공군의 그림자가 훨씬 눈에 많이 띄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뭔가 닥쳐올 것 같은 예감이 내 머릿속을 오가고 있었다.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