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 수풍댐을 향해 북진하는 국군 1사단이 1950년 10월 중순 청천강에 놓인 나무 다리를 지나고 있다. 얼마 뒤 1사단은 영변 북쪽 운산에 서 몰래 들어와 있던 중공군의 1차 공세를 만나 치열한 전투를 치르게 된다. [백선엽 장군 제공]

너무도 조용했다. 1950년 10월, 대한민국 국군 1사단이 진출한 평안북도 운산(雲山)에는 이상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길에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 6·25전쟁 발발 이후 길에서 늘 보아 오던 피란민 행렬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최일선 1사단장이던 나는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1사단은 남침한 북한군을 낙동강에서 격퇴하고 북진을 시작, 평양을 거쳐 그 달 21일 운산 남쪽 영변(寧邊)의 농업학교 건물에 사단 본부를 차렸다. 나는 예하 11·12·15연대를 운산으로 진출하게 했다. 예부터 구름 속, 즉 운중(雲中)으로 불렸던 험한 땅이다. 그곳을 거쳐 압록강 수풍댐을 향해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국군은 통일이 눈앞에 왔다고 생각하며, 미군은 성탄절까지는 전쟁을 마치고 집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압록강을 향해 쾌속 진격을 하고 있었다.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북진을 시작할 무렵의 국군 1사단장 백선엽.
그런데 영변에서 운산으로 향하는 길에서부터 갑자기 인적이 사라진 것이었다. ‘이렇게 조용한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묘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영변의 구룡강(九龍江)을 건너 부대가 북쪽으로 향하던 길에 촌로 둘을 만났다. “왜 이렇게 사람 그림자를 볼 수 없는 겁니까?” 내가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의외였다. “되놈들이 많이 들어왔시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촌로들은 뭔가를 목격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중공군이 이미 압록강을 넘어 이 땅에 들어와 있다는 말인가. 그게 사실이라면, 통일은 어떻게 되고, 앞으로의 전쟁은 또 어떻게 되는가. 가슴이 무겁게 뛰었다.

촌로들의 말을 뒷받침할 만한 중공군 개입 정황은 즉각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중공군 개입이 사실일 경우에 대비하기에 바빴다. 중공군은 일본군에 맞서 10년 이상 실전 경험을 쌓은 군대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부군과 내전을 치르면서 큰 전투를 숱하게 치렀고, 국부군이 대만으로 패퇴하면서 남긴 미국제 무기까지 손에 넣었다.

그런 와중에 평양에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다녀갔고, 이승만 대통령도 곧 방문한다는 전갈이 전해졌다. 평양에 최초 입성한 국군 1사단장으로서 나는 그분들의 동향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24일, 운산 정면 우측에 포진해 있던 15연대(연대장 조재미 대령)가 중공군 포로 1명을 생포해 사단 지휘소로 후송해 왔다. 전날 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군이 야간공격을 해오자 맞받아치고 전진하다 뒤에 처진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 나는 만주 군관학교 시절에 배웠던 중국어로 그를 직접 심문했다.

-출신지는.

“중국 남부 광둥(廣東)성 이다.”

-소속은.

“39군(중공군 정규군의 한 부대) 소속이다.”

-혹시 중국에 살던 한국인 아닌가.

“중국인이다.”

포로는 비교적 순순히 대답했다. 원래 장제스 휘하의 국부군이었지만 홍군(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전의 중공군)의 포로가 됐다가 중공군에 편입됐다고 했다. 중국 남부에 주둔하던 부대가 한반도에 진입했으며, 산중에 이미 수만 명의 중공군이 들어와 숨어있다는 사실을 그의 입을 통해 확인했다. 충격적이었다. 압록강을 넘은 시점이 10월 중순이라고 했는데, 이미 두툼하게 누빈 방한복에 귀마개와 고무운동화까지 갖춰 월동준비를 하고 있었다. 방한복은 겉이 카키색, 안쪽은 흰색이어서 뒤집어 입으면 동계 위장복으로 쓸 수 있었다. 하복 차림이던 국군이나 연합군과는 달랐다.

나는 중공군 개입을 직감했다. 상황이 급박했다. 운산 북쪽에는 험준한 적유령(狄踰嶺) 산맥이 놓여 있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우리 일선 연대가 포진한 운산의 북쪽 20㎞ 지점에는 이미 펑더화이(彭德懐)가 지휘하는 ‘인민지원군’의 총사령부가 차려져 있었다. 중공군은 험준한 적유령 산맥 곳곳에 은밀하게 숨어 있었다. 미군의 공중 정찰로는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나무를 베서 이고 다니고, 낮에는 아예 움직이지 않는 등으로 정찰기의 눈을 속이고 있었다.

적유령은 순우리말로 ‘되너미 고개’다. 중국인을 얕잡아 부르는 호칭, 즉 ‘되놈’들이 넘어오는 고개라는 뜻이다. 북방의 거란·여진·몽골이나 대륙의 군대가 침입해 오는 주요 경로여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는가 보다.

이제 새로운 침입자가 나타났다. 사실, 김일성이 이끄는 인민군은 국군의 북진 이후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대신할 중공군 대군이 이 땅에 잠입한 것이다. 낙동강 교두보에서 북한군을 물리치고 쾌속으로 북진을 거듭하던 국군과 연합군은 운산에서 중공군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통일을 눈앞에 두고 회한의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 개입 초 30만, 전쟁 막바지에는 총병력 150만을 헤아린 중공군을 막기 위해 우리는 그 뒤로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며, 이 때문에 수십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은 50년 10월 북쪽에서 불어오는 싸늘한 바람과 함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여태껏 벌어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성격의 전쟁이 운산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은 동아시아 국제전쟁이었다. 이는 동시에 거대한 살육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