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이 10월 13일 오후 7시 서울 광화문광장 축제무대에서 막을 올린다. 아리랑 대취타로 문을 여는 개막 공연의 주인공은 국악계의 프리마돈나 안숙선 명창, 뮤지컬배우 카이, 우리 시대 최고의 소리꾼 장사익이다.

특유의 한 서린 목소리로 청중의 심금을 울리는 장사익.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그의 음악처럼 소리꾼, 음악인, 예인 등 그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도 많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그저 ‘노래하는 장사익’으로 불러달라 말한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왕성한 현역인 그의 ‘음악 인생’을 듣기 위해 ‘배양숙의 Q’가 장사익의 집을 찾았다. 2층 창문으로 보이는 북악산과 북한산 그리고 인왕산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가 내어온 보이차를 음미하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배양숙의 Q가 서울 종로구 홍지동 장사익의 자택을 찾았다. [프리랜서 조현지]

배양숙의 Q가 서울 종로구 홍지동 장사익의 자택을 찾았다. [프리랜서 조현지]

 
오는 10월 13일 개막하는 ‘2017 서울 아리랑페스티벌’에 12만명이 온다고 합니다. 그런 큰 무대의 개막 공연을 하신다지요?
“제 노래에는 가요도 있고, 국악도 있고, 재즈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국악적인 모티브로 노래합니다. 그래서 공연 때도 항상 한복을 입고요. 저는 아리랑을 특별하게 많이 불렀어요. 제일 기억나는 건 2002년 서울 상암운동장에서 남북한이 처음으로 축구 시합했을 때 대표로 부른 아리랑이에요. 그걸 계기로 평양에서도 몇 번 아리랑을 부르기도 했죠. 그래서 아리랑페스티벌에 섭외된 게 아닌가 싶어요.”
선생님의 노래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립니다.
“저는 노래를 늦게 시작했습니다. 쌓인 시간만큼 노래에 인생의 굴곡이 담겨있어요. 노래는 삶의 이야기거든요. 그러니 듣는 사람들이 자기 얘기처럼 전해 들어요. 그렇게 소통하면서 감동하고, 치유되는 겁니다. 그게 음악, 예술의 힘인 것 같아요. 요즘 젊은 세대는 주로 ‘희(喜)’와 ‘락(樂)’만 주로 노래해요. 그리고 감정이 메말라 있죠. 하찮은 유행가를 들으면서도 울고, 게워낼 수 있어야 해요. 아무래도 저는 나이가 있으니 할 얘기가 많고, 젊은 사람보다는 넓고 깊은 시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요. 클래식도 이야기와 희로애락이 담겨있기 때문에 생명력을 잃지 않고 몇백년 동안 이어져 오는 겁니다. 제 음악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보이차를 우리고 있는 장사익. [프리랜서 조현지]

보이차를 우리고 있는 장사익. [프리랜서 조현지]

 
국회의원이 되려고 웅변 연습하다가 목청이 트이셨다고요.
“어렸을 때는 모두 대통령 아니면 국회의원이 되겠다고들 하잖아요. 저도 초등학교 때 공부도 좀 하고 반장도 해서 국회의원이 꿈이었어요. 옛날에는 3.1절이나 6.25때 반장이 웅변대회를 나갔거든요. 국회의원 하려면 웅변을 해야 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학교 가기 전 새벽에 뒷산에 올라 소리를 질렀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5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발성연습을 했죠. 그때는 제가 이렇게 노래할 줄 모르고 한 일이었지만, 노래하기 위한 씨를 뿌린 게 아닌가 싶어요.”
노래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언제였나요?
“사실 제 목청이 좋다 보니 고등학교 마치고 서울 올라와서 곧장 유행가를 불렀어요. 종로에 있는 고려생명이란 회사를 다니면서 인근 작곡가 사무실에서 3년 동안 유행가를 배웠죠. 군대 가서도 노래하는 곳에서 3년 배웠고요. 제대하고 본격적으로 노래할까 생각했는데, 자질도 없는 것 같고 집안 형편도 안 돼서 꿈을 접었어요. 당시 노래는 나훈아나 남진처럼 아주 특출난 사람들만 했으니까요.”
 
그 뒤로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보험회사 내근직, 경리과장, 과일장수, 카센터 직원 등 25년간 15개의 직장을 전전했습니다. 저는 배운 것도 없고 성격도 차분하지 못해서 직장에 잘 적응하지 못했거든요. 그러다 내가 하고 싶은 거 딱 3년만 해보자 하고 매달린 것이 태평소에요. 그렇게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 참여하기도 하고 대통령상도 받았죠. 사실 저희 아버지는 장구재비(장구) 였고, 삼촌은 날라리(태평소) 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국악을 들으며 자랐고 아버지와 삼촌의 재능이 저에게 오지 않았나 싶어요.”
 
장사익은 장구쟁이 아버지와 날라리 삼촌의 재능을 물려받아 태평소를 불었다. [프리랜서 조현지]

장사익은 장구쟁이 아버지와 날라리 삼촌의 재능을 물려받아 태평소를 불었다. [프리랜서 조현지]

 
데뷔하게 된 계기가 뭔가요?
“하루는 사물놀이패 공연 뒤풀이에서 노래 한 자락을 불렀습니다. 그 노래를 들은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데뷔하게 됐어요. 그때가 1994년 11월, 제 나이 마흔여섯이었어요. 이세상의 모든 꽃들은 다 펴요. 사람도 모두 꽃을 피우는 데 그 시기에 차이가 있을 뿐이에요. 오히려 늦게 피는 꽃들이 향기가 더 진하죠.”
아버지는 국악을 업(業)으로 하는 분이셨나요?
“저희 아버지는 씨돼지 장사꾼이셨습니다.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고 돼지냄새가 났어요. 그런데 그 냄새가 얼마나 구수하고 좋은지 몰라요. 아버지는 제가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항상 자전거 뒤에 저를 태우고 결혼식이나 초상집을 다니셨어요. 동생이랑 저는 해질녘에 항상 시장으로 통하는 다리 앞에서 아버지 오시기만을 기다리곤 했어요. 덩치도 큰 아버지가 술에 취해 오시면 저와 동생의 손을 잡고 집으로 함께 걸어갔죠. 아버지는 무학(無學)이었지만 사람의 도리를 강조하셨어요. 저에겐 그것이 살아가는 데 큰 교훈이 되고 지침이 됐어요. 아버지는 제가 고향에 내려간다 그러면 항상 한두 시간 전에 광천역까지 자전거 타고 오셔서 저를 기다리셨어요. 제가 서울로 올라가는 날은 미리 짐을 싸서 역전에 가 계셨고.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고향역에 내려도 아버지도 안 계시고 자전거도 없는 거예요.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고향은 고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아버지와의 추억 때문에 지난 9월 9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파크콘서트 공연 현장에 자전거를 타고 들어갔어요. 그리고 강화도에서 두루마기 입고 자전거 타는 영상을 찍기도 했습니다.”
데뷔 후 8개의 음반을 내셨어요. 각각의 음반을 통해 선생님의 음악 인생을 듣고 싶습니다.
1집 하늘 가는 길(1995)

1집 하늘 가는 길(1995)

“음반은 기록이라고 하잖아요. 1집부터 8집까지는 그 나이대의 저를 기록해놓은 거예요. 1집 ‘하늘 가는 길(1995)’은 사실 뜬금없이 발매했어요. 연습 딱 두 번하고 데뷔무대 두 번 서고 세 번째에 바로 음반이 나왔죠. 6시간 만에 녹음을 마쳤으니까요. 제가 뒤풀이에서 노래 불렀더니 친구들이 등 떠밀어서 데뷔하게 됐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1집 표지 사진이 바로 뒤풀이에서 노래부르는 사진이에요. 1집은 꽃이 시간이 되면 피듯이 나온 앨범인 것 같아요.
 
 
2집 기침(1999)

2집 기침(1999)

2집은 ‘기침(1999)’이에요. ‘기침’이라는 시가 저희가 사는 모습이랑 똑같아요. 어렸을 때 부모님이 새벽에 담배 피면서 교육비, 생활비, 곗돈 걱정하는 얘기를 이불 속에서 듣잖아요. 저는 그게 노인네 기침하듯이 들리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녹음했는데 영 아니더라고요. 실은 1집을 내고 임동창 선생님(피아니스트)이 그만 뒀어요. 그때 제게 임동창 선생님은 절대적인 존재였거든요. 그 공백이 너무 컸던 거죠. 그래서 앨범을 집어 던져버렸어요. 그러다 아버지가 폐암에 걸리셨어요. 아버지의 병세가 계속 악화되던 중 던져버렸던 2집 앨범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래, 저 부족한 것이 내 모습이다.’ 그렇게 2집 ‘기침’이 세상으로 나오게 됐죠. ‘기침’과 ‘폐암’. 아이러니하게 연결 된 거예요. 그래서 2집은 저한테는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에요.

 
3집 허허바다(2000)

3집 허허바다(2000)

3집은 ‘허허바다(2000)’입니다. ‘허허바다’는 윤회사상이 들어있는 정호승 선생님의 시에요. 세상에는 아침이 있고 저녁이 있고 밤이 있고 그럼 또 아침이 오고 지구도 돌고 태양도 돌잖아요. 우리는 원래 하늘에 떠있는 별이었는데 잠시 지구라는 별에 놀러 왔다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사람의 죽음도 그렇게 생각하면 슬퍼할 일이 없어요. 파도 치는 망망대해에 자그마한 겨자씨 하나가 저희들의 모습이에요. 그러니까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죠. 세상 다 가진 것 같이 폼 잡고 살지 말고 겸손한 자세로 순응하면서 살아야 해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모든 공연이 취소됐어요. 하지만 저는 즐거울 때 하는 것도 음악이지만 슬프고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것도 음악이라고 생각했어요. 공연을 취소하지 않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허허바다’를 진혼곡으로 불렀습니다. 이처럼 어떤 노래를 어떤 때에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 노래를 극대화할 수 있어요.

 
4집 꿈꾸는 세상(2003)

4집 꿈꾸는 세상(2003)

4집은 ‘꿈꾸는 세상(2003)’이에요. 제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집, 이 자리에서 창문을 보는데 까치들이 무리를 이뤄 날아가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그 모습을 보니 저도 날개 달고 어딘가로 놀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느낌으로 이 음악을 탄생시켰어요. 락(rock) 같은 느낌의 곡으로,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요.
 
 
5집 사람이 그리워서(2006)

5집 사람이 그리워서(2006)

5집은 ‘사람이 그리워서(2006)’이에요. ‘시골장’이라는 곡이 들어있어요. 김영수 선생이 미국에서 생활하려니 너무 힘들어서 쓴 시를 노래로 만든 것이죠. 시골장은 물건 파려고 하는 것도 있지만 실은 사람이 그리워서 서는 것이거든요. 가사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이 그리워서 시골장은 서더라. 연필로 편지 쓰듯 푸성귀를 늘어놓고 노을과 어깨동무 하며 함께 저물더라.’ 유행가는 첫 귀에 들어와야 한다고 하지만, 시는 넓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가사로 시를 많이 써요. 그런 시들을 제가 노래하니 청중들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이겠죠.
 
6집 꽃구경(2008)

6집 꽃구경(2008)

6집은 ‘꽃구경(2008)’인데, 이 시는 꼭 저한테 하는 얘기 같았어요. 평생 효도도 제대로 못한 자식얘기. 제가 늦은 나이에 가수로 성공했잖아요. 어머니가 중환자실에서 호흡기 다신 채로 우리아들 노래한다고 자랑하시더라고요. 제가 부끄럽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웃음) ‘꽃구경’을 초연할 때 시인 선생님을 초청해서 노래를 선보였습니다. 그러고 한두달 있다 서울 인사동에서 식사를 대접했어요. 시인 선생님이 저한테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장선생 나한테 실수했어. 실은 내가 장선생 노래하기 전에 우리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셔서 요양원에 보냈어. 그러고 나서 당신 노래를 들으니 내 시가 부메랑이 돼서 내 마음에 박혔어.’
 
7집 역(2012)

7집 역(2012)

7집은 ‘역(2012)’입니다. 제가 중앙일보의 ‘아침을 여는 시’를 자주 보거든요. 역이라고 하면 꿈을 품고 떠나는 곳일 수도 있고, 금의환향하는 곳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서성이는 곳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모습들이 우리 인생살이와 같아요. 사실 ‘역’이라는 시는 가정의학과의원 원장이 쓴 시에요. 영주 부석사에 있는 병원에 노인들이 바글바글 하길래 가서 봤더니, 노인들이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화병도 나니까 늘 거기 있는 거예요. 시골이나 도시나 요새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느꼈죠. 그곳도 또 하나의 ‘역’과 같은 거예요
 
8집 꽃인 듯 눈물인 듯(2014)

8집 꽃인 듯 눈물인 듯(2014)

마지막 8집은 ‘꽃인 듯 눈물인 듯(2014)’입니다. 이는 김춘수 선생님의 시에요. 그분은 약간 추상적인 시를 쓰시거든요. 계속 돌고 도는 모습이죠. ‘아무것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그런 이야기 속에서 운율이 생겨요. 처음에는 이 노래를 높낮이 없이 일정한 음으로 부르려고 하다가 그건 코러스로 넣었어요. 대신 제가 그 위에 즉흥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절에서 들릴법한 소리가 나오더군요. 그래서 저는 ‘꽃인 듯 눈물인 듯’을 노래라기보다는 음악이라고 말해요.”
 
1집부터 8집까지, 음반 하나하나에 선생님이 살아온 삶의 내력과 철학이 담겨 있군요.
“제 노래는 이야기이자 스토리니까요. 마치 삶의 이야기를 노래로 하거든요. 청중들은 제 얘기를 들어주는 것이고요. 사실 저는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서 제 노래의 가사를 많이 차용합니다. 저는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어휘력도 딸려서 그런 가사를 쓰지 못해요. 그런데 제가 생각했던걸 어느 시인이 한 거죠. 저는 시의 운율에 고조, 장단, 감정까지 집어넣으니 사람들한테 더 와 닿는 거예요.”
작년에 목 수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목 수술을 한 것은 달리기 선수가 가다가 다리가 부러진 것과 같았어요. 생명력이 없어지는 거죠. 눈앞이 깜깜했어요. 한 보름 동안은 말 한마디 못하고 살았죠. 그때 생각했어요. ‘내가 앞으로 노래할 수 있을까? 내가 노래를 못하면 뭘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노래를 잊은 저한테는 이 세상에 눈물이었어요. 그런데 다행히도 잘 회복돼 노래할 수 있게 됐어요. 그리고 깨달았죠. 노래는 내 인생의 꽃이었구나. 이런 저의 상황이 ‘꽃인 듯 눈물인 듯’에 오버랩 되더군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그 노래로 콘서트를 계속 하고 있어요.”
 
배양숙 (사)서울인문포럼 이사장이 장사익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프리랜서 조현지]

배양숙 (사)서울인문포럼 이사장이 장사익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프리랜서 조현지]

 
선생님의 음악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道)’가 생각났습니다. ‘도’는 길일 수도 있고 인간의 도리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요. 어떤 의미의 ‘도’이든 우리 삶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삶이란 뭔가요?
“삶이란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래하는 것은 저의 16번째 길이에요. 그 길을 벌써 23년동안 걸어왔죠. 가장 가까운 곳에 진리가 있고 길이 있어요. 너무 급하게 생각하고 길을 찾으려고 축지법 쓰듯 멀리 가려고 하지 마세요. 제가 태평소에 목숨을 걸었더니 노래하는 길이 열렸듯이 내가 받드는 곳이 곧 길이에요. 가을이 지나 겨울이 되면 나무들은 모두 옷을 벗어요. 그 덕분에 다시 싹이 돋는 것이고요. 아무리 우리가 문명을 발전시켜도 자연의 순리는 정해져 있고 거기에 순응하며 살아야 해요. 문명은 우리를 편리하게 만들겠지만 이롭지는 않아요. 어떤 일의 ‘과정’이 없어져 버리니까요. 제가 노래해서 금방 데뷔했으면 오늘 같은 노래를 부를 수도 없었고 대우받지도 못했을 거예요. 빙 돌아온 그 세월이 저한테는 힘이에요. 인생은 하루하루 초석을 놓는 겁니다. 그러니까 급하게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지 말고 지금부터 내가 하나씩 열심히 하면 돼요. 저는 지금 노래 외에도 꽤 오랫동안 글씨를 썼어요. 2007년 이상봉 패션쇼에 제 글씨를 프린트한 옷을 선보인 적도 있죠. 10년이 지나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의미가 있는 거에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평소에 하고 싶은 걸 해보세요.”
남은 길 동안 새롭게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지요?
“지금처럼 계속 노래하는 게 제 꿈이에요. 저는 젊고, 예쁘고, 춤 잘 추는 것도 좋지만 인생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진짜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저처럼 나이 70이 다 돼서도 노래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저는 지금 노래 부를 수 있어서 행복하고, 앞으로도 계속 노래하고 싶을 뿐입니다. 8집에 마종기 선생님의 ‘상처’라는 시를 노래한 곡이 있어요. 그 앞 대목이 참 좋아서 노래 한 소절 불러드릴게요.”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되어 사랑스러운 것이 그냥 사랑스럽게 보이고 우스운 것이 거침없이 우습게 보이네 젊었던 나이의 나여… ♪


인터뷰 도중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장사익. [프리랜서 조현지]

인터뷰 도중 노래를 부르고 있는 장사익. [프리랜서 조현지]

 
해질 무렵 장에 갔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실 아버지를 동생과 기다리던 추억을 얘기하며 장사익 선생님의 눈가가 젖어 들었다. 이내 돼지장수 아버지에게 나는 냄새는 구수했다고, 죽음은 저 하늘에 별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슬퍼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 장선생님은 20여년을 돌고 돌아 마흔여섯 늦은 나이에 운명처럼 노래를 시작했다. 늦게 핀 꽃의 향이 더 진하듯이, 그의 노래는 세상에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는 지금 노래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장선생님을 만난 날 새벽, 몇 가지 질문을 더 찾으려 그의 노래를 들었다. 한동안 노래 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오랜 시간 묵힌 노래에서 깊은 위로를 받았다.



배양숙 (사)서울인문포럼 이사장 betterlife65@daum.net  
정리 = 장하니 인턴기자 chang.hany@joongang.co.kr
 
 

[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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