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향해 거친 말폭탄을 쏟아내고 있는 북한 김정은이 지난주 황해도의 한 과수원을 찾은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과 북한 체제를 지목해 '완전 파괴'를 언급하면서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상황에서 갑자기 지방 사과농장을 방문한 배경에 관심이 쏠린 것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6월 하순 치위생품 생산시설 방문 후 핵과 미사일 도발에 올인해오다 두 달여만에 경제현장 방문으로 이곳을 택했다. 
과수원 둘러보는 김정은.[조선중앙통신]

과수원 둘러보는 김정은.[조선중앙통신]

노동신문은 김정은의 황해남도 과일군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주렁주렁 열린 사과 앞에서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을 여러장 공개했다. 김정은은 "눈뿌리 아득히 펼쳐진 청춘과원을 바라보노니 정말 기분이 좋고 어깨춤이 절로 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쌓였던 피로가 말끔히 가셔진다"고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김일성과 김정일·김정은 3부자는 과일, 벼 등을 통해 이미지 연출을 시도했다.[통일문화연구소]

김일성과 김정일·김정은 3부자는 과일, 벼 등을 통해 이미지 연출을 시도했다.[통일문화연구소]

 김정은이 찾은 과일군은 본래 송화군 송화과수농장지구였다. 김일성(김정은의 할아버지)이 이곳을 방문해 대규모 과수단지에서 많은 과일이 생산된다며 '과일군'으로 개칭할 것을 지시해 1967년 10월에 승격 개편된 곳이다. 김일성 뿐 아니라 김정일도 가을철이 되면 이 곳을 찾아 풍성한 과일을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하는 행보를 이어왔다. 대표적 과일산지를 배경으로 최고지도자의 경제 리더십을 부각 선전하는 이미지를 연출해온 것이다.
김정은의 과일군 과수협동농장 방문 소식을 전한 노동신문 9월21일자 1면. [노동신문]

김정은의 과일군 과수협동농장 방문 소식을 전한 노동신문 9월21일자 1면. [노동신문]

김정은의 이번 과일군 방문도 이같은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6차 핵 실험과 탄도미사일 도발로 국제사회의 제재를 자초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생을 챙기는 제스처를 드러낸 것이란 분석이다. 활짝 웃는 모습도 '제재에도 꿈적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다. 과일군 방문을 '피로회복제' 정도로 언급한 것도 마찬가지다.

맨 위부터 1966년5월 황해제철소를 방문한 김일성과 1988년4월 8호제강소를 찾은 김정일, 2014년12월 제851군부대관하 여성 방사포병 구분대를 현지지도하는 김정은.[통일문화연구소]

맨 위부터 1966년5월 황해제철소를 방문한 김일성과 1988년4월 8호제강소를 찾은 김정일, 2014년12월 제851군부대관하 여성 방사포병 구분대를 현지지도하는 김정은.[통일문화연구소]

김정은은 후계자 시절부터 김일성의 이미지와 카리스마를 차용하는 통치행보를 이어왔다. 2012년 집권 이후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리더십을 유사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장소와 상황을 취사선택하는 수법을 구사했다. 이번에 공개한 김정은의 과일군 방문은 꼭 12년 전인 2005년9월 김정일의 과일군 방문 상황과 유사하다. 뒷짐을 진 모습에서는 60대 나이의 김정일(2005년 당시)을 따라하려는 33살 김정은의 제스처가 드러난다. 지난 7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4형' 시험발사 성공 축하공연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의 미사일 개발 현지지도 장면을 무대화면으로 내보낸 것도 이런 점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7월 '화성-14형' 시험발사 성공 축하공연 무대에 등장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미사일 개발 지도 기록영상. 맨오른쪽은 지난해 3월 핵무기 병기화 사업을 벌이는 김정은.[통일문화연구소]

지난 7월 '화성-14형' 시험발사 성공 축하공연 무대에 등장한 김일성과 김정일의 미사일 개발 지도 기록영상. 맨오른쪽은 지난해 3월 핵무기 병기화 사업을 벌이는 김정은.[통일문화연구소]

하지만 전례없이 극한 도발행보로 국제적 고립을 맞은 김정은의 과수원 방문 쇼가 노동당과 군부 핵심층과 주민들에게 어떻게 비쳐질지는 미지수다. '태평양 상 수소탄 시험' 등 극단적인 위협을 일삼는 북한에게 유엔과 국제사회는 최고의 압박을 가할 채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촘촘한 대북제재가 본격화하면 주민들의 불만은 커질 수 밖에 없다. 올 추석은 풍요로움보다 불안과 공포가 짓누를 공산이 크다. 
 
2012년4월 취임 첫 연설에서 "다시는 우리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공언한 김정은의 말은 5년 넘게 지켜지지 못한 공수표가 됐다. 주민들은 "노동당 보다는 차라리 장마당을 믿겠다'는 말로 불신을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제법 정교해보이는 김정은의 김일성·김정일 이미지 따라하기는 이제 약발이 다한 분위기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이 기사의 취재와 영상편집에는 정영교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원이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