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담 대남비서의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김중린이다. 대남비서가 ‘3수’ 째인 김중린은 1년 2개월 한 뒤 90년 1월 윤기복(1926~2003)에게 물려주었다. 윤기복은 8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부위원장을 맡는 등 남북관계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전임자였던 김중린·허담 등이 정치국 위원까지 승진한 것에 비해 윤기복은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그쳤다.  
 
윤기복 [사진 노동신문]

윤기복 [사진 노동신문]

모스크바 대학에서 통계학을 전공한 윤기복은 경제통으로 출발했다. 57년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겸 중앙통계국장을 시작으로 67년 재정상, 69년 국가계획위원장 등 경제부문 고위직을 두루 지냈다. 윤기복이 대남 관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72년 8월 남북적십자회담 자문위원을 맡고 서울을 몇 차례 다녀가면서부터다. 당시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이 72년 8월 평양에서 열렸다. 남북적십자회담은 이듬해 7월까지 열렸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그 인연으로 윤기복은 8년 뒤 조평통 부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대남관계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89년 범민족대회 위원장을 거쳐 이듬해 대남비서에 올랐다. 범민족대회는 남북한· 해외동포가 참여해 민간 주도의 통일운동을 기틀을 다지는 행사로 90년 8월 15일 제1차 범민족대회가 남과 북에서 각각 진행됐다.
 
북한은 그가 물러나는 92년 12월까지 탈냉전과 한국의 북방정책으로 외교적인 최대 위기를 맞았다. 한·소 수교(1990년), 한·중 수교(1992년) 등 북한의 우방국들이 한국과 손을 잡으면서 외교적 고립이 가속화됐다. 반면 남북한은 90년 9월부터 남북고위급회담을 열어 91년 남북기본합의서, 92년 한반도비핵화선언 등 결실을 보았다.
 
윤기복은 대남비서로 있으면서 남북고위급회담에 참석하는 연형묵 북한 총리 등 일행들을 지도했다. 그는 91년 12월 평양을 방문한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도 만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 윤기복은 김일성의 특사로 1991년 11월, 1992년 4월 두 차례 서울을 방문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해를 마무리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생각의 결과였다.  
 
윤기복(사진 왼쪽) 대남비서가 1991년 12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는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윤기복(사진 왼쪽) 대남비서가 1991년 12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는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윤기복은 두 번째 방문 때 김일성의 친서와 초청장을 갖고 서울에 왔다. 윤기복은 “4월 15일 김일성 주석 생일과 때를 맞춰 노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 정상회담을 갖자”고 전격 제의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김일성 생일 축하행사의 일환으로 정상회담을 이용하려는 북한의 계산된 의도에 말려들 수 없었다. 노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나는 정상회담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모양새가 너무 나쁘다고 판단해 초청을 거절했다. 모양새를 구겨 가면서까지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고 밝혔다.
 
이것으로 대남비서로서 윤기복의 임무는 거의 끝났다. 대남비서로서 활동하는 동안 90년 최고인민회의(한국의 국회) 통일정책위원장,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장 등을 겸임했다. 92년 12월 대남비서에서 물러난 뒤 당 과학교육비서를 맡았다. 자신의 원래 전공과 유사한 곳으로 돌아갔다. 노동신문은 2003년 5월 10일 그의 부고에서 “오랫동안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위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지혜와 정력을 다 바쳐 투쟁했다”고 기록했다. 이를 통해 윤기복의 삶의 궤적이 경제와 통일 분야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말년에 다시 통일 분야로 돌아왔다. 그는 99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중앙위원회 공동의장에 임명됐다. 공동의장으로 박성철 전 총리,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김용순 전 대남비서, 류미영 전 천도교 청우당 위원장 등이 있었다. 조국전선은 노동당의 통일노선과 정책을 옹호·관철하는 전위기구로 46년 북한의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들이 조직한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모태로 하여 49년 정당과 사회단체를 망라해 재조직한 단체다.
 
윤기복은 그 이후의 활동이 알려지지 않다가 오랜 병환 끝에 2003년 5월 사망했다. 그는 대남비서 선배였던 김중린·허담에 비해 역할이 적은 탓인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언급한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