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6대 총리는 이근모다. 재임기간은 1986년 12월부터 1988년 12월까지로 2년이었다. 총리 가운데 최단명했던 박성철 보다 4개월 더 한 셈이다. 이근모는 탈북민들도 기억을 못할 정도로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전임 강성산 총리가 김정일의 ‘눈치밥’에 기를 펴지 못했듯이 이근모도 마찬가지였다. 서슬 퍼런 김정일 밑에서 살아남으려면 복지부동이 최고였던 것이다.
 
 
이근모 정무원 부총리(김정일 뒷편)가 1984년 서해갑문을 방문한 김일성과 김정일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사진 우리의 지도자]

이근모 정무원 부총리(김정일 뒷편)가 1984년 서해갑문을 방문한 김일성과 김정일을 수행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은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사진 우리의 지도자]

우리가 어렴풋이 그를 기억하는 것은 1987년 1월 총리를 맡자마자 오진우 인민무력부장과 함께 공동명의로 한국에 남북고위급 정치?군사 회담을 제의한 정도다. 하지만 당시는 성사되지 못했다. 남북고위급 회담은 1990년 9월에 가서야 비로소 서울에서 열렸다. 당시 연형묵 총리가 단장으로 내려왔다.  
 
이근모는 한국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등으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을 무렵에 총리직에 올라 1987년부터 시작한 제3차 7개년계획(1987~1993)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가 총리에 임명된 것은 개혁 성향 때문이다. 김일성이 준퇴진 상태가 됐고 권력이양 과정을 밟고 있던 김정일이 당시에 개혁 성향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이근모는 전형적인 테크로크라트 출신이다. 김일성종합대학을 거쳐 소련 레닌그라드공업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53년 노동당 조직지도부 과장을 시작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그 이후 당 기계공업부장과 평안남도 당 책임비서·인민위원장, 정무원(현 내각) 부총리 겸 채취공업부장을 거쳐 86년 정무원 총리에 임명됐다.
 
그가 맡은 첫 번째 임무는 제3차 7개년계획을 조기에 성공시키는 것이다. 제3차 7개년계획의 특징은 이전의 경제계획에 비해 목표치를 하향 조정한 점이다. 제2차 7개년계획(1978~1984)은 과거에 비해 국민소득 1.9배, 공업총생산 2.2배였지만, 제3차 7개년계획은 국민소득 1.7배, 공업총생산 1.9배였다.  
 
이근모는 이런 하향 조정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근본적으로 중공업 우선의 경제발전 전략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북한은 전쟁 상황이나 전쟁을 준비하는 조건에서 적용되는 중공업-경공업-농업 순서를 6.25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버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북한은 여전히 미국과 전쟁중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국가 규모가 작고 경제발전 수준이 낙후된 국가가 중공업 중심의 공업화를 고집할 경우 농업과 경공업은 더욱 낙후시킬 수 밖에 없다. 그 영향 탓에 북한은 국민경제의 기형적 발전과 생산력의 위축, 그리고 인민생활의 쇠락을 가져왔다.
 
이에 반해 중국은 맑스-엥겔스의 유물론을 근거로 사람들에게 의식주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농업-경공업-중공업 순서를 채택했다. 그 결과 북한과 중국은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제2차 7개년계획에서 ‘재미’를 보지 못한 김일성은 실패를 반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 87년 5월 베이징을 방문했다. 제3차 7개년계획의 성공적인 수행과 경제발전을 위해 중국의 지원이 어느 때보다 절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 때보다 대규모 방문단은 아니었다. 필요한 인원만 대동했다. 허담 대남비서, 김영남 외교부장, 이종옥 전 총리가 수행하는 정도였다. 허담은 전 외교부장 자격으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중국은 여유가 없었다. 4대 현대화사업(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에 소요되는 투자 증대에 따라 외부에 대한 지원을 매우 제한했다. 따라서 상황이 호전되면 대북 지원을 개선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김일성은 그해 11월 이근모를 중국에 보냈다. 마침 중국이 제13차 당대회를 끝난 이후라 중국 지도부는 기분이 들떠 있을 때였다. 새로운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된 자오쯔양은 “중국은 조선노동당과 조선인민이 우리 당 제13차 대회를 열렬히 축하해 것에 대해 충심으로 감사를 표한다”며 “오늘 조선인민은 새로운 7개년계획의 웅대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며 북한을 추켜세웠다.  
 
 
이근모(사진 오른쪽)가 연도 미상 평양시 건설사업을 현지지도하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수행하고 있다. 이근모 오른쪽으로 연형묵이 보인다. 연형묵은 이근모 후임으로 총리에 임명됐다. [사진 우리의 지도자]

이근모(사진 오른쪽)가 연도 미상 평양시 건설사업을 현지지도하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수행하고 있다. 이근모 오른쪽으로 연형묵이 보인다. 연형묵은 이근모 후임으로 총리에 임명됐다. [사진 우리의 지도자]

하지만 덩샤오핑은 달랐다. 이근모는 그의 장황한 ‘설교’를 들어야 했다. 덩샤오핑은 이근모에게 중국의 개혁?개방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고 북한에도 이것의 필요성을 간접적으로 강조할 뿐이었다.
 
김일성에 이어 이근모도 ‘빈손’으로 귀국했다. 기대했던 중국의 지원은 없는데다가 처음부터 삐걱거렸던 제3차 7개년계획은 93년에 경제계획의 실패를 시인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북한은 93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제6기 제21차 전원회의에서 주요 목표들이 미달됐다고 인정했다.  
 
이근모는 88년 12월 국가보위부(현 국가보위성) 마약판매 담당이었던 아들이 총살을 당하고 자신은 지병까지 도져 총리직에서 해임됐다. 당시는 억울했을 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운이 좋았다. 그가 총리에서 물러난 다음해인 1989년부터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붕괴로 북한의 대외경제 환경이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제3차 7개년계획의 실패는 후임 연형묵 총리가 뒤집어쓰게 됐다.
 
이근모는 총리에서 물러난 뒤 4년 뒤인 92년 함경북도 당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김정일이 98년 함경북도 성진제강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할 때 수행했으며 그 이듬해 함경북도를 다시 찾았을 때도 그를 수행했다. 이근모는 2001년 7월 그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그 이후의 행적은 공개되지 않았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