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총리직을 2번 한 사람이 2명 있다. 강성산(1931~2007)과 박봉주다. 강성산은 5대 총리(1984~1986년)와 8대 총리(1992~1997년)를 지냈다. 박봉주는 다음에 소개할 예정이다. 강성산은 첫 번째 총리를 마치고 지방으로 좌천됐다가 6년 뒤에 다시 총리로 복귀했다. 남들은 ‘복’도 많아 두 번씩이나 총리를 한다고 하겠지만 그에게는 불편했던 시기였다.  
 
 
강성산 총리 [사진 중앙포토]

강성산 총리 [사진 중앙포토]

강성산은 중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강위련이고 삼촌은 강위룡이다. 강위련은 항일혁명시기 기관총 분대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강위룡은 해방 이후 김일성의 호위사령부 책임자였다. 이런 인연으로 강성산은 어릴 때부터 김일성의 사랑을 톡톡히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강성산은 혁명유자녀를 북한 최고의 엘리트로 양성하는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후 체코 프라하 공대를 유학하며 테크노크라트로 성장했다. 당시 유학 동문으로는 6대 총리 이근모(1986~1988)와 7대 총리 연형묵(1988~1992)이 있다. 김일성은 1969년 군수시설들이 모여 있는 자강도 당 책임비서에 강성산을 발탁했다. 이후 그는 평양시 당 책임비서를 거쳐 1973년에는 평양시 인민위원장을 맡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임명되면서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섰다. 1975년에는 정무원(지금의 내각) 교통체신위원장을 맡아 중앙 부처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정무원 부총리를 거쳐 1984년 정무원 총리에 임명됐다.  
 
그는 김일성의 신임을 받았지만 김정일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김일성의 둘째 부인 김성애의 남동생 김성갑과 각별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김정일과 김성애는 물과 기름이었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강성산은 평양시 인민위원장에 있을 때 김성갑을 위해 집을 지어주기도 했다.
 
김성갑은 누나의 위세를 등에 업고 1960년대 중반 평양시 당 조직비서를 맡는 등 군과 당에 자기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다. 김정일은 김성갑과 어울려 다니는 강성산이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실제로 그는 첫 번째 총리직에 있으면서 김정일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
 
 
김일성이 1985년 8월 만경대 물놀이장을 강성산 총리(사진 왼쪽) 등과 함께 둘러보고 있다. 오른쪽으로부터 4번째에 김정일도 보인다. [사진 영광의 50년]

김일성이 1985년 8월 만경대 물놀이장을 강성산 총리(사진 왼쪽) 등과 함께 둘러보고 있다. 오른쪽으로부터 4번째에 김정일도 보인다. [사진 영광의 50년]

1980년대 북한의 경제 성장은 상당히 둔화돼 있었다. 자력갱생을 구호로 국가계획경제에만 집중한 결과다. 한편, 중국은 1979년 ‘중외합작경영기업법’을 제정해 자유무역지대인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대외개방정책으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중국의 경제 성장을 지켜본 북한은 외국으로부터의 기술 및 자본 도입이 필요함을 실감했다.  이에 1984년 북한은 외국과의 합작투자를 위한 합영법을 제정했다. 바로 강성산이 총리로서 합영법을 주도했다.
 
북한은 합영법을 시행함으로써 본격적인 개혁·개방을 모색했다. 강성산은 1985년 모스크바를 방문해 고르바초프와 만나 ‘경제 및 기술적 협조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당시 북한은 소련과의 경제협력 덕분에 이전의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고 제3차 7개년계획(1987~1993)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의 개혁·개방 시도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북한이 합영회사를 운영하면서 기대했던 공업·운수·건설·과학기술·관광 사업의 투자와는 달리 실제로는 소규모의 경공업과 서비스업에서만 투자가 이뤄진 것이다. 강성산은 합영법 시행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해임됐다. 이후 그는 1988년 함경북도 당 책임비서로 좌천됐다.
 
하지만 김일성은 4년 뒤 그를 다시 불렀다. 제3차 7개년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다. 연평균 성장률 7.9%, 국민소득 1.7배의 목표에 전혀 미치지 못했고, 각종 지표는 오히려 계획을 시작한 때의 전반으로 떨어졌다. 김일성은 강성산이 과묵했지만 붙임성이 좋고 실무능력이 뛰어난 점을 높이 평가해 다시 기회를 주었다. 이로써 그는 두 번째 총리(1992~1997년)를 맡게 됐다.  
 
 
강성산 총리가 1996년 4월 가족들과 함께 만수대언덕에 있는 김일성 동상에 헌화하고 있다.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강성산 총리가 1996년 4월 가족들과 함께 만수대언덕에 있는 김일성 동상에 헌화하고 있다. [사진 조선중앙TV 캡처]

하지만 시기적으로 그의 총리 재임은 불운했다. 첫째, 그를 아껴주었던 김일성이 1994년에 사망했다. 둘째, 두 번째 총리 재임 기간에 ‘고난의 행군(1995~1997년)’으로 불리는 북한 경제의 최악의 시기가 덮쳤다.  
 
경제 전문가였던 강성산도 ‘고난의 행군’ 시기에 아무 힘도 쓸 수 없었다. 김정일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식물 총리’였다. 그리고 지병으로 병원에 누워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김정일은 강성산을 총리에 앉혀 두었다. 어려운 시기에 ‘말’을 바꾸는 법이 아니었던가 보다.  
 
그는 고난의 행군이 끝나가던 1997년 홍성남 총리 대리체제가 들어서면서 총리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 사망할 때까지 그의 행적은 공개되지 않았다.  
 
이경주 인턴기자 lee.kyoungj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