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이종옥(1916~1999)을 제4대 총리로 임명하면서 테크로크라트 시대를 열었다. 이전의 김일· 박성철 등 항일빨치산 출신들이 경제를 담당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전문 경제인들이 북한 경제를 맡기 시작한 것이다.
 
 
이종옥 총리 [사진=노동신문]

이종옥 총리 [사진=노동신문]

이종옥은 1940년 중국 하얼빈 공업대학을 졸업한 ‘공대생’이다. 이종옥이 대학을 다닐 때는 일제시대로 일본이 이 대학을 운영하고 있었다. 북한에서는 일본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들을 ‘식민지 인테리’로 부른다. 이종옥도 그런 사람이었다. 해방 이후 김일성은 인재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가 비록 일본 대학에 다녔지만 함경북도 청진방적공장 지배인으로 보냈다.
 
이종옥은 여기서 뜻하지 않는 운명을 맞이한다. 그는 공장을 복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 공장에 근무했던 경력자를 영입해야 했다. 현지인 가운데 숙련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이종옥에 불만을 가진 주변 사람들이 ‘친일행위’라며 그를 고발한 것이다. 당시 친일행위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곤란한 처지에 빠진 그를 구한 것이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이다. 김정숙이 청진에 잠시 머물 때 문전걸식하던 여성을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 여성이 청진방적공장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여성이 김정숙에게 이종옥의 딱한 사정을 알려준 것이다. 김정숙은 이를 김일성에 보고해 이종옥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김정숙이 이종옥에게 생명의 은인이 된 셈이다.  
 
김일성은 훗날 이종옥에게 “김정숙이 그 때 나에게 얘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동무는 더 큰 고생을 했을 거야”라고 말했다. 이종옥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 예를 들면 ‘김일성의 책사’였던 김책이 “똑똑한 지식 청년을 또 한 명 찾아냈다”며 김일성에게 그를 추천하기도 했다.  
 
이종옥은 1949년 산업성 부상, 경공업상을 거쳐 1956년 북한 계획경제를 책임지는 국가계획위원장에 올랐다. 그는 국가계획위원장을 맡으면서 노동당 공업부장을 겸직했다. ‘공대생’ 출신이라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1961년 제4차 노동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이 되면서 정치국 서열 11위로 승진했다.  
 
그 이후로도 승승장구는 이어졌다. 이종옥은 내각 부수상 겸 금속화학공업상을 맡았다. 하지만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법. 1968년 김일성의 ‘대안의 사업체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반당 분자로 지목돼 함경북도의 광산지배인으로 좌천됐다. 대안의 사업체계는 공장·기업소의 지배인 단독 책임제에서 공장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제로 바꾸었다. 이종옥은 이 방식이 효율성을 떨어뜨린다고 본 것이다. 김일성은 이런 이종옥에게 “그 누가 뭐래도 나는 동무를 100% 믿소. 아니 200%, 300%를 믿소”라며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주었다.
 
이종옥(왼쪽에서 세번째) 국가 부주석이 1991년 10월 중국 방문에 앞서 김일성 등과 신의주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주창준 주중 북한 대사, 김용순 비서, 이종옥 국가 부주석, 김일성, 한성룡 비서,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 [사진=노동신문]

이종옥(왼쪽에서 세번째) 국가 부주석이 1991년 10월 중국 방문에 앞서 김일성 등과 신의주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주창준 주중 북한 대사, 김용순 비서, 이종옥 국가 부주석, 김일성, 한성룡 비서, 강석주 외교부 제1부부장. [사진=노동신문]

 
이종옥은 1972년 다시 광업상으로 복귀하고 정무원 부총리를 거쳐 1977년 경제사령탑인 총리에 임명됐다. 이종옥이 총리로 임명 될 당시 북한은 후계자로 지명된 김정일 시대가 시작될 즈음이었다. 이종옥이 총리로 임명된데도 김정일의 영향이 가장 컸다.
 
테크노크라트였던 이종옥은 김정일에게 필요한 사람이었다. 당시 북한 경제는 화려했던 60년대를 마감하고 더딘 성장을 하고 있을 때다. 1975년 경제성장률이 5.4%였는데, 계속 낮아져 1980년에는 3.8%에 불과했다. 쌀 생산량도 1975년에는 281만t이었다가 1980년에는 265만t으로 줄었다. 이렇게 추락하는 북한 경제를 살릴 ‘소방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종옥은 총리를 맡으면서 인민경제발전 제2차 7개년(1978~1984년) 계획을 시작했다. 이 계획의 슬로건은 인민경제의 주체화·현대화·과학화였다. 주체화는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동력기지, 원료기지를 확대해 자체 생산능력을 높이자는 것이다. 현대화·과학화는 생산공정의 기계화와 자동화를 전면적으로 실현하자는 구호였다. 이 슬로건은 지금도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다.
 
북한은 경제발전을 위해 사회적으로는 ‘숨은 영웅 따라 배우기 운동’을 벌였다. 공장 노동자들 속에서 모범이 되는 사람을 골라내 그를 전면에 내세워 닮도록 하는 운동이다. 종전의 운동이 집단적 노력 경쟁을 독려하는 것인데 반해 이 운동은 개인적 모범을 창출해 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 경제는 옛날로 다시 돌아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김정일은 이종옥의 노력만큼은 인정했다. 그래서 1980년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이종옥을 노동당 상무위원으로 임명했다. 총리가 노동당 상무위원을 겸한 첫 번째 사례였다.
 
북한에서는 보직 보다 정치국 서열이 더 중요하다. 총리가 경제 정책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정치국 서열이 높아야 한다. 중국을 보더라도 리커창 국무원 총리가 정치국 서열 2위다. 전임 총리였던 원자바오는 정치국 서열 3위였다.  
 
 
이종옥 국가 부주석(사진 가운데)이 1991년 10월 9일 김일성과 함께 중국 산동성 곡부시의 역사문화유적들을 돌아보고 있다. [사진=노동신문]

이종옥 국가 부주석(사진 가운데)이 1991년 10월 9일 김일성과 함께 중국 산동성 곡부시의 역사문화유적들을 돌아보고 있다. [사진=노동신문]

하지만 북한은 총리가 정치국 서열에서 중국처럼 높지 않을 경우가 많았다. 자세한 내용은 앞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이종옥은 비(非) 항일빨치산 출신에다가 테크노크라트 출신으로 정치국 서열 5위된 것이다. 박성철(6위), 최현(7위), 임춘추(8위) 등 쟁쟁한 항일빨치산 출신들을 제쳤다.  
 
이종옥은 1983년 7월 정치국 상무위원에 해임되고 그 이듬해 총리에서도 물러났다. 화려했던 시절이 끝난 것이다. 명예직인 ‘국가 부주석’을 얻었지만 이제는 ‘훈수꾼’이 돼 버렸다. 그의 마지막 공직은 1998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다. 그는 이듬해 8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노동신문은 1999년 9월 24일자 2면에 그의 부고란에 “해방 후 첫 시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국의 융성발전을 위해 활동해 온 재능 있는 지도 일꾼”이라고 이종옥을 기록했다.
 
이경주 인턴기자 lee.kyoungj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