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이 물러난 후 총리 자리를 이어받은 제3대 총리는 박성철(1913~2008)이다. 그는 군인출신으로 항일혁명시기 김일성의 ‘당번병’으로 활동했다. 해방 이후 그는 김일성의 신임을 바탕으로 10여 년간(1959~1970) 외무상을 지내며 북한 외교의 ‘얼굴마담’ 역할을 했다. 총리직은 1년 8개월 맡았고 최단명이다.
 
 
박성철 북한 전 총리 [사진=중앙포토]

박성철 북한 전 총리 [사진=중앙포토]

 
김일과 박성철은 지금의 총리처럼 경제전문가가 아니었다. 김일성이 경제의 ‘경’자도 모르는 이들에게 총리에 앉힌 것은 시키는 일은 잘해서였다. 김일성이 시킨 일은 항일유격대식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박성철은 경북 경주시 출신으로 1934년 항일유격대인 동북인민혁명군(후일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해 자신보다 한 살 많은 김일성과 함께 활동했다. 해방 이후 그는 항일투쟁시기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1950년 제15사단장으로 6.25전쟁에 참가했다.
 
 
하지만 그는 6.25전쟁 당시 연전연패(連戰連敗)를 당하면서 사단장에서 해임됐다. 하지만 전쟁 이후 1953년 민족보위성(인민무력성) 정찰국장으로 기사회생했다. 김일성은 이듬해 “전쟁도 끝났으니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말고 외국에 가서 지내다 오는 게 좋겠다”며 불가리아 북한 공사로 내보냈다. 당시 박성철은 전쟁 중에 복부수술을 받은 후유증에다가 위장병을 앓고 있었다.
 
 
김일성은 1956년 그를 노동당 국제부장으로 불렀다. 국제부는 사회주의권과의 당(黨)대 당(黨) 외교를 담당하는 부서로 중국·러시아 공산당의 창구였다. 그 이후 외무성 부상, 외무상으로 승승장구했다. 김일성은 박성철을 본격적으로 북한의 대외활동에 앞장서는 ‘얼굴마담’으로 키우고자 했다.
 
 
김일성은 1965년 인도네시아 방문 때도 그를 데리고 다니며 신흥세력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도록 가르쳤다. 덕분에 박성철은 10여 년 간 외무상으로서 외교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1972년에는 내각 제2부상으로 7·4남북공동성명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7·4남북공동성명을 위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먼저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만났다. 하지만 서울 답방은 김 부장 대신에 박성철이 내려왔다. 남북대화 석상에서 박성철은 이전의 북한 사람들과는 다른 풍모를 보였다고 한다. 몸집이 컸고 악착스럽지 않았으며 대화할 땐 구수하고 털털하게 말했다. 아마도 김일성은 그의 털털한 풍모를 ‘얼굴마담’으로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29일 서울에 도착한 박성철(사진 오른쪽) 북한 내각 제2부수상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중앙포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29일 서울에 도착한 박성철(사진 오른쪽) 북한 내각 제2부수상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중앙포토]

 
돈 오버도퍼 전 워싱턴포스터 기자는 자신의 저서 『두개의 한국』에서 “남북한은 공동성명 날짜를 미국의 독립기념일(7월 4일)로 택한 것은 아마도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천명하기 위해서인 듯했다”고 기록했다.
 
 
1976년 박성철은 정무원 총리로 임명됐다. 경제 사업은 그에게 생소한 업무였지만 김일성은 자신이 내각수상으로 지낼 때의 경험을 이야기해주며 박성철이 총리 역할을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도록 도와줬다.  
 
 
북한은 1977년을 인민경제발전 6개년 계획(1971~1976)이 차질을 빚자 1년을 더 연장해 마무리 하려던 ‘완충의 해’로 정했다. 북한은 그 해 오랜 가뭄으로 처음으로 전력부족이 산업 현장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북한의 전력설비는 수력과 화력이 6:4로 수력의 비중이 높다. 따라서 가뭄은 북한 전력사정에 적신호였다.  
 
 
박성철은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화력발전소의 전력생산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수력발전의 감소는 전력 부족으로 이어졌고, 전력 부족은 석탄 생산을 감소시켰다. 전력은 석탄생산에서 필수요인이다. 석탄 감소는 또 다시 화력발전소의 전력 생산에 차질을 빚게 했다. 북한의 이런 악순환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전력공업성과 석탄공업성이 서로 ‘남 탓’을 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북한은 두 부처를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했다. 전기석탄공업성은 1962년 내각에 처음 만들어졌다가 1972년 전력공업부와 석탄공업부로 분리됐다. 1998년 전기석탄공업성으로 합쳤다가 2006년 다시 지금의 전력공업성과 석탄공업성으로 분리했다. 이렇게 반복하는 이유는 전력과 석탄의 생산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총리까지 승승장구 하던 박성철에게 시련이 다가왔다. 바로 김정일 때문이다. 후계자 지명 과정에서 박성철은 우유부단한 자세를 취했다. 그것이 김정일에게 ‘눈엣가시’였다. 김정일은 그에게 “악질”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정일은 자신의 후계자 지명에 불만이었던 사람들에게 톡톡히 분풀이를 했다. 김동규 국가 부주석, 이용무 총정치국장, 지경수 당 검열위원장, 지병학 인민무력부 부부장 등을 숙청했다. 박성철이 김정일의 칼날에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박성철은 1977년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명예직인 ‘국가 부주석’을 맡게 됐다. 하지만 80년대 들어 김정일이 명실상부한 후계자가 되면서 박성철의 공식 활동은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93년 박성철 국가부주석의 생일 80돌을 맞아 직접 전화해 축하해주고 수예품 대형병풍에 “박성철 부주석의 생일 80돌을 축하하여. 김일성”을 새겨주기도 했다. 그는 김일성이 사망하기 전까지 최측근에 있었던 혁명 1세 원로였다.  
 
1998년 김정일은 국방위원장으로 재추대되면서 헌법을 개정하고 주석제를 폐지했다. 그해 박성철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에 임명됐다. 그는 2008년 사망하기 전까지 자리를 지켜왔다.  
 
 
박성철 전 총리의 유가족들이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을 방문해 그의 반신상 주위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사진=월간 조국]

박성철 전 총리의 유가족들이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을 방문해 그의 반신상 주위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사진=월간 조국]

 
그는 사망한 이후 다른 항일혁명투사들과 함께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안장됐다. 김정일 은 박성철의 장례식에 직접 참석하지 않고 빈소에 조화만 보냈다. 반면 김정일은 오진우 인민무력부장과 연형묵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등의 장례식에는 참석했다.
 
 
이경주 인턴기자 lee.kyoungjo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