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통일전문기자 통일문화연구소장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통일문화연구소장

미 해병 1사단과 중공군 9병단이 격돌한 1950년 11월 말 함경남도 장진호(長津湖)에는 영하 40도의 혹한이 몰아쳤다. 7개 사단 12만 명 규모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린 2주간의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 600여 명을 포함해 7300여 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그중 3700여 명이 동상 환자였다. “비상 식량인 삶은 감자 3개는 돌처럼 얼어 먹지 못했다. 죽은 동료의 총을 회수하려 얼어붙은 그의 손을 부러트릴 수밖에 없었다”는 참전 병사의 증언(육군군사연구소 『1129일간의 전쟁 6·25』)은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말해 준다. 생존 미군들은 장진호 전투를 ‘초신 퓨(The Chosin Few)’라고 부른다. 장진호의 일본식 이름인 초신호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의미다.

이런 희생 끝에 감행된 흥남철수작전은 1·4후퇴의 시작이었다. 중공군의 동계작전에 압도당한 국군과 유엔군은 이듬해 1월 4일 서울을 다시 빼앗기게 된다. 우리 민족에게는 자유민주주의 통일의 기회를 눈앞에서 빼앗긴 통한의 날이다.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을 6·25전쟁의 공동 주범이라고 낙인찍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꼭 66년이 흐른 지난 4일 중국 베이징 외교부 청사. 일단의 대한민국 제1야당 의원을 왕이(王毅) 외교부장이 환한 얼굴로 맞았다. 환담에서 왕 외교부장은 고(高)고도미사일방어 체계인 사드(THAAD)의 한반도 배치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우리의 자위 조치에 ‘감 놔라 배 놔라’ 식 내정 간섭을 늘어놓은 것이다. 쿵쉬안유(孔鉉佑) 외교부 부장조리(차관보급)는 ‘한류 유통 제한조치인 한한령(限韓令)을 철회해 달라’는 의원들 요구에 “중국 국민이 제재한 것”이란 엉뚱한 소리까지 했다.

왕이와 같은 포즈로 다리를 꼰 채 마주한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의 모습은 언뜻 당당해 보인다. 하지만 면담 후 나온 브리핑에선 일방적 훈계만 들은 듯한 분위기가 드러난다. 사드는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에 노출된 대한민국의 사활적 안보 이익이다. 이미 정책 결정이 이뤄져 시행 단계에 들어갔다. 게다가 중국은 한반도 전역과 알래스카까지 탐지권역(5500㎞)에 두는 첨단 레이더를 이미 가동 중이다. 백두산 뒤편 지린(吉林)성 퉁화(通化)에는 우리 주요 군사기지를 타격할 수 있는 둥펑(DF)-15와 인근 해역 미국 항모를 목표로 한 둥펑-21 미사일이 배치됐다.

중국의 태도는 유사시 한반도에 군사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시도를 막지 말라는 ‘조폭식 논리’와 다름없다. 남의 마당을 한눈에 훔쳐보면서도 상대에게는 눈길도 두지 말라는 억지다. 그런데도 의원들은 중국의 면전 압박에 제대로 된 대응을 못했다. 한술 더 떠 “우리 국회의원들이 만난 중국 인사 중 최고위급”이라며 의미 부여에 급급하다. “1·4후퇴 날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는 비판 여론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지금 우리의 안보 상황은 가히 누란지세(累卵之勢)다.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유고(有故) 상태다. 국정은 ‘박근혜 없는 박근혜 정부’가 맡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을 전후해 미국의 대북정책은 당분간 진공 상태가 불가피하다. 세력 주도권을 쥐려는 중국과 러시아의 각축도 긴장감을 더한다. 이 틈을 겨냥한 듯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새해 벽두부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 완성 단계”를 주장한다.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2일 김정은 신년사에 대해 “선제 공격까지 운운한 건 위험천만한 행동”이라며 이례적인 비판 목소리를 냈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도 이튿날 경기도 파주 포병부대를 찾았다. 제1야당의 안보관에 대해 쏟아지는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소속 당 의원들의 저자세 방중 행보는 이를 한번에 말아먹는 패착이자 자충수다.

국민은 이미 ‘최순실의 감방’과 ‘박근혜의 청와대’에서 눈을 돌려 다가오는 봄을 바라보고 있다. 촛불로 그려 낸 대한민국의 2017년 청사진과 새로 선출될 권력의 정책 성향을 주시하는 것이다. 국가 안보와 대북 문제도 그 핵심에 있다. 국민은 이런 의문표를 던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안보를 어디에 가서 묻고 있느냐고.

이영종 통일전문기자·통일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