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통일문화연구소장

이영종
통일문화연구소장

며칠 전 홍용표 통일부 장관에게 무척 곤혹스러운 일이 닥쳤다. 통일 관련 학술회의 축사를 요청받고 간 자리에서 한 참석인사가 “요즘 통일장관은 할 일이 없으시겠어요”라는 말을 면전에 불쑥 던진 것이다. 뜻밖의 돌직구에 홍 장관은 “그래도 기본 업무가 있는데…”라고 받아넘겼지만, 한 차례 웃음들을 터뜨린 좌중에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라는 블랙홀에 빠져 좌초한 대한민국호(號)에서 통일·대북정책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의미인 듯했다.

직격탄을 맞은 건 홍 장관뿐만이 아니다. 교수·연구원·박사 등으로 불리며 인기 절정을 치닫던 북한 전문가나 탈북 인사들의 방송출연 섭외는 한 달 전부터 완전히 끊겼다. 유엔의 초강력 대북제재가 발표되고, 북한 김정은이 포격훈련장을 찾아 “남조선 것들 쓸어 버리라”는 막말 위협을 해도 단신처리되는 상황이니 어쩌면 당연한 세태다. 강연과 기고 등으로 월 1000만원 이상 과외수입을 올려 온 스타급을 일컫는 ‘월천(月千) 선생’들 사이에선 “연말 대목에 이게 뭔 난리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북한이 도발 수위를 올릴수록 주머니가 두둑해지던 ‘적대적 공생관계’가 깨졌다는 우스개까지 번질 정도다.

최순실 사태는 통일·대북 분야에도 짙은 그림자를 던졌다.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 브랜드인 ‘통일 대박’을 두고 최씨의 작명일 것이란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박 대통령이 2014년 신년 회견에서 언급하기 7개월 전 『통일은 대박이다』란 책의 저자인 신창민 중앙대 명예교수가 아이디어를 건넸다는 사실이 드러나고서야 잠잠해졌다. 하지만 불신의 골은 깊이를 모를 정도다. 지난 2월 개성공단 폐쇄 결정이 최순실의 작품이란 루머까지 돌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정책의 격(格)과 신뢰가 추락하면서 추진 동력은 급격히 떨어진 상태다. 정부와 엘리트 당국자의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대북전략들마저 순수성을 의심받고 있다. 마뜩지 않던 정책적 결정에 대해 ‘주술적 차원의 결정이었을 것’이라고 치부하면 일견 속시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분풀이성 대응만으로는 이성적 대안제시가 이뤄질 수 없다. 북한을 다뤄야 하는 대북정책과 외교·안보 결정은 고차원 방정식이다. 개성공단의 운명이 비선실세의 말 한마디에 쥐락펴락할 수 있는 문제라면 당시 정부의 고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홍용표 장관의 부르튼 입술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대북 대응의 집중력도 눈에 띄게 흐트러졌다. 김정은이 “남진(南進)의 길을 가자”는 호전적 발언을 쏟아냈지만 심각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북한 추정 해커들이 지난 8월부터 우리 군 내부 전산망을 유린한 충격적 사태를 두고서도 마찬가지다. 5차 북핵 도발에 유엔과 국제사회가 오랜 산통 끝에 새로운 대북제재 방안을 내놓았지만 정작 한국의 반응은 미지근하다는 게 외신 평가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자의 대북 인식을 선점하고 공조하려는 외교적 노력도 부실해 보인다. 노련한 평양의 외교전략가들은 이런 틈을 비집고 든다. “트럼프의 대북정책을 파악하기 전까지는 도발하지 않을 것”(최선희 북한 외무성 미국국장)이란 유화 제스처로 워싱턴을 노크하고 있다.

북한의 정세와 한반도 기류는 결코 녹록지 않다. 이달로 집권 5주년을 맞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최근의 남한 내 정국혼란을 천재일우(千載一遇)로 여길 수 있다. 최순실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영웅칭호라도 안기고픈 심정일 것이다. 노동신문에는 박근혜 정부의 몰락을 대한민국 보수세력의 완전한 패퇴로 이어 가려는 선동 분위기가 묻어난다. 32세의 청년 지도자 김정은은 내친김에 50년 집권 플랜을 짜고 싶을지 모른다. 남한 정세에 대한 오판 우려도 나온다. 토머스 밴덜 주한 미 8군사령관은 사흘 전 한국 언론인들과 만나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경고했다. “북한은 트럼프 정부의 대북 기조를 도발을 통해 확인하려 할 것이며 한국도 정치적 전환기”라는 점을 거론하며 “향후 30일에서 60일 사이에 도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대북 정책에는 역대 정부의 철학과 지향점이 응축돼 있다. 북한에 대한 온정주의적 접근과 교류·협력을 강조한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대북 저자세와 ‘퍼주기’ 논란에 발목이 잡혔다. 이런 폐해를 넘어서겠다던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깐깐한 원칙을 세워 북한 다루기에 나섰지만 남북 긴장 상태의 지속으로 피로감을 노출했다. 내년 말로 잡혀 있던 차기 대선에선 각각 10년씩을 집권한 진보·보수 정권의 장단점을 헤아려 선순환 구도의 남북관계 청사진을 짜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메머드급 스캔들은 이런 스케줄을 완벽하게 헝클어트려 버렸다. 당겨진 등판 일정에 차기 대선주자 모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됐다. 준비되지 않은 리더십과 정책 아마추어리즘이 재연될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과 걱정이 앞서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탄핵정국은 오늘 거대한 분수령과 맞닥뜨린다. 분명한 건 앞으로도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더욱 깊은 수렁에 빠질 공산도 크다. 이런 정국 소용돌이에 휘말려 대북 정책의 공백기가 생기는 건 아닌지 단단히 챙겨 봤으면 한다. 지금 달려야 하는 건 탄핵열차만이 아니다.


이 영 종
통일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