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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미제의 산물’로 여기던 커피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원두커피를 파는 카페가 속속 문을 열고 있다. 사진은 북한 여행사의 여성 가이드가 평양 ‘해맞이 식당’에서 카페라테를 마시고 있는 모습. [사진 DPRK360, 중앙포토]

날렵한 몸매의 16cm 막대 모양 포장이 낯설지 않다. 한쪽 끝을 뜯어 종이컵에 기울이니 갈황색과 흰색이 섞인 입자가 ‘촤르륵’ 소리를 내며 쏟아진다. 물을 따르자 달착지근한 커피향이 퍼져 오른다. 서울에 처음 상륙한 북한판 커피믹스(혼합형 커피)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평양에도 커피믹스가 등장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한 건 지난 5월 하순. 이우영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가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면서다. 기자는 즉각 이 교수의 연구실로 달려갔다. 커피를 한때 ‘미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여겨 멀리하던 북한이 대중화된 커피믹스까지 만들었다니 놀라웠다. 지금은 가동이 중단됐지만 개성공단에서 5만여 명의 북한 근로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품목 중 하나가 커피믹스였다. 처음엔 쓴맛 때문에 꺼리던 북측 근로자들은 점차 빠져들었고 ‘남조선 막대커피’로 부르며 인기를 끌었다. “신기하게 이것만 한잔 먹으면 졸리지도 않고 끄떡없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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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커피믹스는 묘향세휘합영회사에서 출시한 ‘삼복커피’다. 겉면에는 ‘평양시 선교구역 강안1동’이란 주소와 연락처가 적혀 있다. 노란 계역의 막대 모양 포장이나 건조 커피·설탕·크림으로 구성된 모양새가 남한 것을 그대로 베낀 게 드러난다. 낱개 포장 1개 당 12g의 중량과 13.3%의 커피 함량 비율, 입자 크기와 촉감까지 국내 제품들과 유사하다. 생산지 표기만 없다면 남북한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삼복커피는 올해 초부터 평양은 물론 신의주·개성 등 주요 도시에서 본격 유통됐다. ‘삼복’의 한자 표기가 없어 정확한 뜻은 파악되지 않는다. 한 탈북자는 “북한에서 최고지도자인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은덕을 각각 지칭하는 ‘수령복(福)·태양복·장군복’이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기호식품에도 체제 찬양의 의미를 담은 것이란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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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커피믹스 맛 대결에 참가한 대학생들. 왼쪽부터 조범희(중앙대 정치외교4), 임하늘(이화여대 무용4), 이나영(이화여대 언론정보3), 석훈철(한양대 경제4), 송지은(제주대 정치외교4) 학생. [사진 신인섭 기자]

맛은 어떨까 하는 호기심에 커피믹스 남북한 맛 대결을 해보기로 했다. 또 기술 수준 등을 알아보기 위해 커피 전문 생산업체에 성분 분석도 맡겼다. 문제는 샘플이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 충분한 맛 검증과 기술평가를 위해서는 20~30개의 커피믹스 완제품이 필요했다. 결국 평양을 다녀온 교포인사를 통해 구매를 의뢰했고, 입수된 제품을 분석하고 취재하는 데 2개월여가 걸렸다.

맛 대결을 위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시음회를 열었다. 커피 애호가를 자처하는 대학생 남녀 6명을 섭외해 평가단을 짰다. 비교군으로는 국내 커피믹스 시장 점유율 1~3위를 각각 차지하고 있는 동서식품의 ‘맥심’과 남양유업의 ‘프렌치카페’, 롯데 네슬레의 ‘네스카페’ 제품을 올렸다. 또 대형 마트 2개사(이마트·홈플러스)의 자체 브랜드(PB)도 포함했다.

6개 제품의 브랜드를 가린 뒤 향·당도·부드러움으로 항목을 구분해 각 5점 만점짜리 채점표를 만들었다. 북한 삼복커피는 15점 만점에 10.6점으로 맥심과 공동 3위를 기록했다. 의외의 결과였다. 임하늘(25)씨는 “북한 제품은 커피믹스 하면 떠오르는 맛에 가장 가까웠다”고 평가했다. 석훈철(29)씨는 “풍미가 기대 이상”이라고 호평했다. 반면에 이나영(22)씨는 “카페인이 많이 들어간 느낌이라 가볍게 먹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동서식품 연구팀은 “삼복커피는 기술적인 면에서는 수준이 낮은 제품”이라고 평가했다. 북한 커피믹스가 비용은 적게 들지만 커피 향 손실이 큰 분무 건조 방식(농축액의 수분을 뜨거운 바람으로 증발시킴)으로 생산됐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국내 5개 제품들은 모두 커피 향 보존 효과가 높은 동결 건조 방식으로 생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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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을 중심으로 중산층 이상 주민들이 커피에 관심을 갖게 된 건 2012년 초 김정은 집권 이후다. 스위스에서 조기 유학한 경험이 있는 김정은은 그해 9월 평양 해맞이식당 커피숍에서 부인 이설주와 커피를 마시기도 했고, 이 장면은 북한 TV로도 공개됐다. 이후 ‘별무리 찻집’이나 ‘금릉카페’ 등 서구식 커피점이 등장했다. 이곳에선 에스쁘렛소(에스프레소)·카푸치노·카페모카 등을 접할 수 있다. 북한 원화로 400~900원대에 팔린다. 북한 근로자의 한 달 월급이 평균 3000원 수준이니 원두커피를 즐기는 것은 아직은 평양 특권층의 문화다. 외국인을 상대하는 평양 순안공항 커피숍은 이보다도 비싸다고 한다. 방문객들 사이에서는 “순안공항 커피 값은 아시아 최고 수준”이란 얘기가 나온다.

싱가포르의 사진작가 아람 판은 지난해 직접 별무리 찻집을 방문했던 영상을 자신의 유튜브 계정에 공개했다. 별무리 찻집에선 각종 커피는 물론이고 파스타 등의 식사와 디저트까지 제공해 손님몰이를 하고 있었다. 대동강변의 평양호텔 5층에 있는 전망대 커피점에선 ‘윈나 커피(비엔나 커피)’와 고구마 라테·녹차라테까지 제공된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커피믹스도 등장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개성공단 근로자 간식으로 초코파이에 이어 ‘막대커피’가 제공되면서 입소문을 타게 된 것도 한몫했다고 한다. 한류 바람이 북한 주민들의 입맛까지 사로잡게 되자 북한도 대응에 나서고 있다. 실제 지난 5월 열린 7차 노동당대회를 계기로 주민들에게 배급된 과자세트에는 북한식 초코파이인 ‘초콜레트(초콜릿) 단설기’와 우리의 국화빵과 유사한 ‘단풍잎 소빵’ 등이 포함됐다. 평양 시내 상점엔 갈색 병에 담긴 커피맛 우유와 콘 형태의 아이스크림도 출시됐다. 모두 남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유형의 간식들이다.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이미 바뀐 입맛은 어쩔 수 없어도 남조선 사상의 유입만은 막아보겠다는 절박함이 엿보이는 변화”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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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영 교수는 “북한이 커피믹스 같은 기호식품도 직접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자체를 의미있게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집권 후 ‘국산품 애용’을 강조하는 김정은의 지시가 강도 높게 이행되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4월 출간돼 북한 간부들의 필독서로 꼽히는 김정은 명언집에는 “수입병을 없애는 것도 사회주의 수호전이다”는 김정은의 언급이 소개됐다. 핵 실험 등 북한의 도발로 인한 유엔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국면에서 이 같은 추세는 더 강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S BOX] 90년대엔 재일동포들이 보낸 일본산 커피가 최고 인기

“밥 태운 물을 왜 마시나 ….”

북한 노동당 간부가 설탕·프림을 타지 않은 ‘블랙 커피’를 처음 마신 뒤 내뱉은 소감이다. 까만 색과 씁쓸한 맛에 누룽지를 완전히 태운 다음 끓여낸 물로 오해했다는 에피소드다. 탈북 작가 김주성(48)씨는 “1990년대 중반 집으로 놀러 온 당 간부에게 나름 대접한다고 커피를 냈다가 오히려 당혹스러운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라고 전했다. 재일동포 3세인 그는 79년 아버지와 함께 북송선을 타고 평양에 정착했다가 2009년 탈북했다.

김씨가 처음 북한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커피 문화라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상류층을 중심으로 러시아나 베트남산 건조 커피가 조금씩 유행했다. 그러나 프림이나 설탕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쓴 커피만 마셨다고 한다. 김씨는 “일본에서 건너 온 이른바 ‘귀국자 집안’을 통해 프림이 처음 퍼졌다”고 주장했다. 재일동포 출신들이 북한의 커피 보급에 일부 기여했다는 얘기다. 90년대 후반 장마당을 통해 외국의 커피가 본격 들어오기 전까진 재일동포들이 보낸 일본산 커피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씁쓸한 맛 때문에 커피를 새로 개발된 술로 오해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연출됐다고 한다. 평양에서 열린 중앙기관의 행사에 참가해 ‘수령님의 선물’로 커피를 받은 지방의 한 간부가 선물로 받은 커피 한 통을 가마솥에 전부 끓여 반주로 곁들였다는 ‘전설’도 있다고 김씨는 전했다.

서재준 기자·전민경 인턴기자(이화여대 언론정보4) suh.jaejoo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