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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한 호텔 지하에 있는 화면반주음악장(한국의 노래방)에서 일하는 여성 봉사원이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여성 봉사원은 북한 뿐 아니라 한국·중국 노래, 팝송을 부른다. [사진 중앙포토]

중국 내 북한식당 종업원이 탈북하면서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들이 식당에서 부르는 한국 노래도 그 가운데 하나다. 북한에서는 이를 ‘계몽기가요’라고 부른다. 해방 이전의 대중가요를 말한다. ‘목포의 눈물’, ‘ 황성옛터’, ‘나그네 설움’, ‘눈물젖은 두만강’ 등 1920년대부터 해방전까지의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노래들이다. 한국의 KBS ‘가요무대’에서 주로 들을 수 있는 곡들이다. 나라를 빼앗긴 한민족의 눈물겨운 처지와 민족적 울분을 반영한 노래로 일제에 대한 항거의 정서가 깔려 있어 북한 주민들에게 부르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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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반주음악장(한국의 노래방). [사진 중앙포토]

‘계몽기가요’를 확산시키는데 가장 앞장 선 사람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김 위원장은 계몽기가요를 민족의 귀중한 음악유산으로 생각했다. 김 위원장은 “일부 사람들이 계몽기가요를 덮어놓고 부르지 못하게 한다는데 옳지 않다”며 “텔레비젼 방송과 소리 방송(라디오)으로 내보내라”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김 위원장은 계몽기가요 가운데 ‘눈물젖은 두만강’을 특히 좋아했다. 그는 2007년 노동당 중앙위원회 문학예술부문 책임일꾼들과 한 담화에서 “몇해(2002년) 전에 외국방문을 마치고 두만강을 건널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눈물젖은 두만강’이었다”며 “우리 어머님(김정숙)님께서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건넜던 강이라 이 노래를 들으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 탄생 90주년과 조선인민군 창건 70주년을 맞아 2002년 만든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아리랑’의 첫 노래로 ‘눈물젖은 두만강’을 넣기도 했다.

김 위원장의 지시로 계몽기가요는 북한 내부 뿐 아니라 해외식당에서도 자유롭게 부를 수 있게 됐다. 북한은 계몽기가요를 확산시키면서 주의사항도 붙였다. 계몽기가요와 해방 이후 한국에서 만들어진 노래들을 잘 구별할 것을 주문했다. 10년 전 중국 내 북한식당으로 일하다 탈북한 조나경씨는 “1980~90년대 한국에서 나온 노래 가운데 계몽기가요와 비슷한 유형의 노래들이 있어 계몽기가요로 잘못 알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노래가 ‘홀로 아리랑(서유석 노래)’ 이다. 조씨는 “노래 제목에 ‘아리랑’이 붙어있어 착각하기 쉬웠고 리듬도 계몽기가요와 비슷해 헷갈렸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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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래는 ‘계몽기가요’라 불리는 해방 전 대중가요로 ‘목포의 눈물’ ‘ 황성옛터’ ‘번지없는 주막’ 등이 있다. [사진 중앙포토]

북한은 지난해부터 계몽기가요를 ‘민족문화’로 재평가하고 조선중앙TV에서 심심찮게 등장시키고 있다. 북한 최고의 음악·무용 교육기관인 평양음악무용대학은 계몽기가요를 정규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 북한이 계몽기가요로 분류한 노래는 600여곡이다. 이 가운데 일부를 편곡하기도 했다. 북한은 편곡할 때 당대의 시대감이 살아나게 하려고 악기 편성을 요란하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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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한 탈북자 최순영씨는 “많은 악기를 사용하면 본래의 맛을 살릴 수 없고 오히려 억지로 꾸민 맛이 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수들에게도 계몽기가요는 노래에 담겨져 있는 감정을 살리기 위해 소박하게 부를 것을 주문한다고 한다. 최씨는 “김 위원장의 지시로 계몽기가요를 튀지 않게 불렀고 복장은 전통의상을 주로 입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해외 북한식당의 출입을 자제할 것을 권고했다. 따라서 한국 사람들이 중국 내 북한식당에서 계몽기가요를 들을 기회가 사라졌다. 중국 베이징에 사는 중국 동포 김기석씨는 “한국 사람들이 북한식당을 찾지 않아 종업원들이 공연할 때 계몽기가요 대신에 중국 손님들을 위해 중국 노래와 팝송을 주로 부른다”고 말했다. 이들이 부르는 팝송은 ‘마이 웨이(My Way)’, ‘탑 오브 더 월드(Top of the world)’, ‘예스터데이(Yesterday)’ 등이다.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ko.soosuk@joongang.co.kr